퇴폐 아이돌님은 옆집에 살고 계셔 / 2권 / Chapter 01
CHAPTER 01: 옆집 여자는 일상 복귀도 멋대로 한다
돌아온 신휘는 일상 복귀도 제멋대로 시작한다. 다키마쿠라 상자를 둘러싼 소동 끝에, 도윤은 처음으로 SHINHWI의 세계 안쪽으로 발을 들인다.
옆집 여자는 일상 복귀도 멋대로 한다
상자는 결국 열렸다.
정확히 말하면, 열렸다기보다 내가 졌다.
세상에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이 있다.
예를 들면 회사에서 갑자기 내려오는 야근 지시. 예를 들면 편의점 앞에서 마지막 남은 삼각김밥을 초등학생에게 빼앗기는 일. 그리고 예를 들면.
본인이 본인 등신대 다키마쿠라 상자를 뜯겠다고 침대 밑에 엎드려 기어 들어가는 SHINHWI를 막는 일.
나는 졌다.
완패였다.
“신휘 씨.”
“응.”
“그거 그렇게 쓰는 물건 아닙니다.”
“다키마쿠라잖아.”
“맞습니다.”
“안는 거잖아.”
“맞긴 한데요.”
“베개잖아.”
“맞긴 한데요.”
“그럼 맞네.”
“사람에게는 맞아도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신휘는 내 방 바닥에 길게 누워 있었다.
정확히는, 내 방 바닥에 펼쳐진 SHINHWI Velvet Inferno Limited Body Pillow Full Set 위에 엎드려 있었다.
성인 인증. 소량 한정. 판매 시작 3분 만에 품절. 팬덤에서조차 “공식이 미쳤다”, “이건 거의 야겜 특전 아니냐”, “아니 SHINHWI니까 가능한 거다”로 며칠 동안 전쟁이 났던 바로 그 물건.
그리고 지금 그 물건의 주인공이 그 물건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자기 얼굴이 인쇄된 등신대 다키마쿠라를 쿠션 삼아서.
인류는 아직 이 장면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편해.”
신휘가 말했다.
“그건 다행입니다.”
나는 최대한 인간의 언어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다행인데, 제 정신은 안 편합니다.”
“왜.”
“신 씨가 신휘 씨를 안고 있잖아요.”
“내 얼굴인데.”
“그래서 더 이상합니다.”
“도윤이 샀잖아.”
“그건 또 다른 층위의 문제입니다.”
“층위 귀찮아.”
“저도 귀찮습니다. 근데 지금 제 인생이 층위별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신휘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다키마쿠라를 뒤집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늦었다.
봤다.
앞면은 이미 충분히 사회적 사망이었다.
검은 레이스. 붉은 조명. Velvet Inferno 콘셉트 특유의, 법적 안전선 마지막 1밀리미터 위에서 균형을 잡는 듯한 의상. 가릴 곳은 가렸다.
문제는 그 ‘가렸다’가 건전함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점이었다.
앞면은 그랬다.
그런데 뒷면은.
“…….”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다키마쿠라는 양면이었다.
당연하다. 풀 세트니까. 양면 인쇄니까. 상품 설명에도 적혀 있었으니까.
하지만 상품 설명을 읽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다르다.
뒷면의 SHINHWI는 등을 보이고 있었다.
등을 보이고 있다고 해서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앞면이 “법의 규제는 알고 있습니다”라면, 뒷면은 “알고 있으니까 여기까지 왔습니다”였다.
역시 가릴 곳은 가렸다.
정말 가릴 곳만.
마치 법과 윤리와 팬덤의 심장 건강을 전부 한 줄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서 하이힐을 신고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처럼.
이건 공식 굿즈다.
공식.
공식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너무 무서워졌다.
“도윤.”
“네.”
“얼굴 빨개.”
“사람이 사회적으로 죽기 직전이면 혈액순환이 활발해질 수 있습니다.”
“아직 안 죽었어.”
“거의 죽었습니다.”
“기특해.”
“왜요.”
“버텼어.”
“그게 칭찬입니까?”
“응.”
신휘는 뒷면 쪽을 끌어안고 바닥에서 한 번 더 굴렀다.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신휘 씨.”
“응.”
“최소한 본인이 본인 다키마쿠라를 끌어안고 뒹구는 장면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여기지 말아 주세요.”
“왜?”
“이건 일반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도윤 집이잖아.”
“제 집이라서 더 문제입니다.”
“밖 아니잖아.”
나는 말을 멈췄다.
신휘는 다키마쿠라에 턱을 올린 채 나를 보았다.
짧은 흑발은 대충 말라 있었고, 헐렁한 흰 티셔츠는 한쪽 어깨가 조금 내려가 있었다. 손에는 초코우유 팩이 들려 있었다.
무대 위에서 검은 레이스와 붉은 조명을 통제하는 사람.
지금은 내 방 바닥에서 자기 등신대 다키마쿠라를 베개 삼아 초코우유를 마시는 사람.
같은 사람이다.
이 사실을 뇌가 아직도 가끔 거부한다.
“그래도 사진은 안 찍어.”
신휘가 말했다.
나는 손을 내렸다.
“그건 당연한 겁니다.”
“도윤 죽잖아.”
“알고 있었습니까?”
“응.”
“알고 있는데 왜 하십니까?”
“실내용.”
“그 단어가 면죄부처럼 쓰이면 안 됩니다.”
“비공개 굿즈.”
“공개하면 안 되는 굿즈겠죠.”
“비슷한 거.”
비슷하지 않다.
전혀 비슷하지 않다.
그러나 한 달 동안 나는 깨달았다.
신휘에게 ‘비슷한 거’는 설명하기 귀찮은 모든 사물과 상황과 감정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만능 폐기물 봉투 같은 말이었다.
물론 그 봉투도 분리수거는 안 된다.
“그거 다시 상자에 넣읍시다.”
“싫어.”
“왜요.”
“편해.”
“편하면 안 됩니다.”
“도윤도 써.”
“제가요?”
“응.”
“저는 제 정신을 지키고 싶습니다.”
“기특하네.”
“칭찬하지 마세요.”
“잘 참아서.”
“칭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신휘는 아주 작게 웃었다.
낮고 짧은 웃음.
그 웃음은 무대 위에서는 관객을 지옥 입구까지 데려가는 소리처럼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내 사회적 생명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노는 소리였다.
나는 한숨을 쉬고 방을 둘러보았다.
책장에는 SHINHWI 앨범들이 꽂혀 있었다. 벽에는 포스터가 있었다. 노트북에는 한 달 전 끝난 라이브 송출 프로그램의 바로가기 아이콘이 아직 남아 있었다. 침대 밑에는 더 이상 상자가 없었다. 대신 방 한가운데에 그 상자의 내용물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신휘가 있었다.
한 달 전, 이 방은 무대가 되었다.
좁고, 평범하고, 라면 냄새가 나고, 침대 밑에 다키마쿠라 상자를 숨겨야 했던 방.
그런데 신휘는 그곳에서 기타를 들고 노래했다.
처음엔 작은 방이었어. 숨소리뿐인 밤. 누구도 듣지 않는 곳에서. 내 이름을 다시 불러.
그 목소리는 아직도 가끔 방 안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SHINHWI가 돌아온 지 한 달이 지났다.
정확히 말하면, 세상은 그렇게 정리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처음 며칠은 난리였다.
내 방에서 갑자기 켜진 공식 라이브. 흰 티셔츠를 입고 기타를 든 신휘. 예고도 없이 불린 MY STAGE. 그리고 화면 한쪽에 아주 희미하게 잡힌 내 책장과 포스터와, 미세하게 흔들린 내 손.
그날 이후 인터넷은 며칠 동안 불탔다.
SHINHWI 진짜 복귀 MY STAGE 방구석 라이브 급식소남 카메라 워크 NOVA LINE 알고 있었냐 폐극장 사건 정리 그때 영상 있음?
마지막 검색어를 봤을 때, 나는 휴대폰을 껐다.
구역질이 났다.
사람들은 정말 쉽게 궁금해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디까지 당했는지. 공개되지 않은 영상은 없는지. 그 화면이 실제로 송출되었다면 어떤 장면이 나왔을지.
그 사람들에게는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아니었다.
나는 그 현장으로 갔고, 문을 열었고, 카메라와 조명과 그 남자의 눈을 봤다.
그래서 알았다.
그건 무대가 아니었다. 복귀도 아니었다. 팬심도 아니었다.
그건 누군가가 신휘의 이름과 몸과 이미지를 멋대로 훔치려던 일이었다.
다행히 한 달이 지나자 그런 저속한 열기는 조금 가라앉았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인터넷이라는 곳은 쓰레기를 스스로 치우지 않는다. 그냥 더 새롭고 자극적인 쓰레기가 올라오면, 이전 쓰레기가 아래로 밀릴 뿐이다.
그래도 표면적으로는 조용해졌다.
NOVA LINE MUSIC은 공식 입장을 냈고, 법적 대응을 시작했고, 자세한 피해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팬덤은 MY STAGE를 복귀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언론은 “SHINHWI, 비공식 라이브로 복귀 신호탄” 같은 제목을 붙였고, 사람들은 점점 다음 소식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휘는.
내 방에서 본인 다키마쿠라 위를 굴렀다.
“인류는 왜 이렇게 불균형합니까.”
내가 중얼거리자 신휘가 고개를 들었다.
“뭐가?”
“세상은 아직 신휘 씨를 전설적 복귀의 주인공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정작 신휘 씨는 본인 공식 성인 굿즈를 베개 삼아 초코우유를 마시고 있잖아요.”
“둘 다 나야.”
나는 말을 멈췄다.
신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검은 드레스도 나고, 흰 티도 나고, 이거도 나야.”
그녀가 손바닥으로 다키마쿠라를 툭 쳤다.
“다 내가 고른 거잖아.”
나는 그 말을 들은 채 잠깐 가만히 있었다.
그건 맞았다.
정확했다.
신휘는 자신의 이미지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안다.
검은 드레스도 그녀의 선택. 붉은 조명도 그녀의 선택. 평범한 흰 티셔츠의 밤도 그녀의 선택. 그리고 팬덤이 야겜 굿즈냐고 난리가 난 이 다키마쿠라도, 결국 그녀가 허락한 공식 이미지의 일부였다.
그걸 아는데도.
“그래도 이걸 제 방에서 본인이 안고 뒹구는 건 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도윤도 골랐잖아.”
“구매와 현장 목격은 다릅니다.”
“어렵네.”
“어렵습니다.”
“인간 문명.”
“이번 건 문명이 아니라 제 정신의 문제입니다.”
신휘는 다시 다키마쿠라에 볼을 묻었다.
“편해.”
나는 졌다.
정말로 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회사에 출근했다.
“서도윤 씨.”
“네.”
“결재선 잘못 올렸어요.”
“아.”
나는 모니터를 보고 굳었다.
정말 잘못 올렸다.
상품기획팀에 가야 할 문서가 왜 총무팀에 갔는지 모르겠다.
아니, 안다.
내 방에서 본인이 본인을 안고 뒹구는 SHINHWI를 보고 출근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회사에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피곤하게 했다.
옆자리에서 박정민 대리가 커피를 들고 나를 보았다.
“한 달 지났는데 아직 영혼이 그쪽 방에 있습니까?”
“제 영혼은 원래부터 회사에 없었습니다.”
“그건 근태상 문제가 있는데요.”
“몸은 있습니다.”
“최소 조건이네요.”
박 대리는 내 모니터를 슬쩍 보고, 마우스를 잡아 결재선을 다시 잡아줬다.
“여기. 다시 올리세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됐고, 점심 뭐 먹을지나 생각해요.”
“벌써요?”
“서도윤 씨가 점심 고민 안 하면, 오후 업무 때 얼굴이 망합니다.”
“제 얼굴은 원래 망해 있습니다.”
“아뇨. 평소엔 그냥 직장인 얼굴이고, 배고프면 폐업 직전 편의점 얼굴이에요.”
“비유가 너무 구체적입니다.”
“관찰 결과입니다.”
박 대리는 늘 이런 식이었다.
말은 가볍고, 표정은 능청스럽고, 사람을 놀리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선을 넘지는 않았다.
한 달 전부터 회사 안에서 내 이름이 이상하게 돌기 시작했을 때도 그랬다.
처음에는 모두가 조심하는 척하면서 궁금해했다.
“그 연예인 진짜 옆집이에요?” “그날 라이브 진짜 도윤 씨 방에서 한 거예요?” “기사에 나온 그 남자가 도윤 씨 맞죠?” “SHINHWI 실제로 보면 어때요?” “폐극장 사건 때 진짜 현장에 있었다면서요?”
질문들은 웃는 얼굴로 왔지만, 대부분은 내 대답보다 내 반응을 보고 싶어 했다.
그때마다 박 대리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업무 얘기합시다.” “그건 여기서 물어볼 얘기 아니죠.” “궁금하면 연예 뉴스 보시고, 우리는 보고서 봅시다.” “서도윤 씨는 검색어가 아니라 우리 팀 사람입니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말투에는 더 들어오지 말라는 선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 대리는 신휘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늘 이렇게 불렀다.
그 분.
“그 분은 요즘 괜찮으세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조금 놀랐다.
신휘라고 부르지 않았다. SHINHWI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그 연예인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 분.
누가 들을지도 모르는 회사에서 불필요하게 이름을 꺼내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괜찮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아마도요.”
“아마도?”
“그 분 기준으로는요.”
박 대리는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반인 기준으론 안 괜찮을 수도 있겠네요.”
“꽤 자주 그렇습니다.”
“분리수거는요?”
“아직도 못 합니다.”
“그건 재능 부족이네요.”
“심각합니다.”
“밥은요?”
“초코우유를 식사라고 주장합니다.”
“그건 식품 업계도 곤란하겠는데요.”
“가끔 젤리를 추가하면 영양 균형이라고 생각하십니다.”
“인간이 아니라 편의점 행사 조합이네요.”
“그런데 또 음악 작업은 밤새 합니다.”
“불균형하네요.”
“굉장히요.”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아주 잠깐 고민했다.
다키마쿠라 이야기는 하지 말자.
절대 하지 말자.
회사에서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 내 사회적 생명은 사직서를 내기도 전에 퇴사 처리될 것이다.
박 대리가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그래도 세상은 넓고, 재앙은 가까이 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옆집의 재앙.
SHINHWI의 대표곡 Pretty Little Disaster.
정확한 표현이었다.
한 달 동안 나는 그 재앙에 꽤 익숙해졌다.
신휘는 정말로 일상생활에 재능이 없었다.
분리수거는 여전히 인간 문명의 음모로 취급했고, 배달 앱 자동 로그인이 풀릴 때마다 휴대폰이 고장났다고 주장했다. 냉장고에는 초코우유와 에너지드링크와 젤리와 정체불명의 소스가 있었고, 싱크대에는 컵이 증식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내 집에는 라면이 늘었다.
처음에는 비상식량이었다.
퇴근 후 귀찮을 때 끓여 먹는 평범한 봉지라면 몇 개.
그런데 신휘가 그 존재를 알게 된 뒤부터 라면은 더 이상 내 비상식량이 아니었다.
공공재가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신휘 기준으로는 급식소 메뉴가 되었다.
문제는 그 급식소가 내 집이라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초인종이 울렸다.
“도윤.”
“네.”
“밥.”
“무슨 밥이요?”
“있는 거.”
“여기는 식당이 아닙니다.”
“급식소?”
“더 아닙니다.”
“비슷한 거.”
“비슷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휘는 이런 식이었다.
내 집에 오면 라면이 나왔다. 냉동볶음밥도 나왔다. 계란도 나왔다. 가끔 즉석밥도 나왔다. 배달 앱 비밀번호를 잊어도 내가 기억했다. 초코우유만 마시고 하루를 버티려 하면 내가 잔소리를 했다.
그러니 그녀의 머릿속에서 내 집은 점점 이상한 장소가 되어갔다.
밥이 나오고. 잔소리도 나오고. 대충 앉아 있어도 되고. 가끔 자도 되는 곳.
그리고 이제는 본인 다키마쿠라도 있는 곳.
내 방은 점점 주거 공간이 아니라 신휘 전용 복합문화시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한 달쯤 지나니까 좀 조용해졌죠?”
박 대리가 말했다.
“회사 분위기요?”
“네. 처음엔 다들 연예부 기자처럼 굴더니.”
“박 대리님이 막아주셔서 그렇습니다.”
“그건 맞아요.”
“부정은 안 하시는군요.”
“제가 잘한 건 인정해야죠.”
박 대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도 조심해요. 잦아든 거지, 없어진 건 아니니까.”
“네.”
“그 분 이름도 되도록 회사에서 먼저 꺼내지 말고요. 누가 듣는지 몰라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박 대리는 의자를 내 쪽으로 살짝 굴렸다.
“도윤 씨도 너무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마요.”
나는 손을 멈췄다.
그는 모니터를 보는 척하면서 말했다.
“그냥 하는 말이에요. 한 달 지났다고 다 끝나는 건 아니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박 대리는 더 묻지 않았다.
그게 좋았다.
그는 내가 말할 수 없는 부분을 굳이 파고들지 않았다.
그냥, 알고 있다는 듯 옆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박 대리를 가장 신뢰했다.
회사에서만큼은.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이름 하나가 떠 있었다.
신 씨.
나는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뒤집었다.
늦었다.
박 대리는 이미 봤다.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 분?”
“……네.”
“받아요. 저는 못 들은 척합니다.”
“못 들은 척할 사람이 그렇게 즐거워 보이면 안 됩니다.”
“표정 관리는 다음 직급에서 배우려고요.”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전화를 받았다.
“네.”
전화 너머에서 신휘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윤.”
“네.”
“회사야?”
“회사죠. 평일 오후 두 시입니다.”
“그래?”
“신 씨는 지금 몇 시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잠깐 침묵.
“아침?”
나는 눈을 감았다.
박 대리가 내 표정을 보고 조용히 웃음을 참았다.
“신 씨.”
“응.”
“지금 오후 두 시입니다.”
“오.”
“오가 아닙니다.”
“밥 먹었어?”
“저는 먹었습니다.”
“난 안 먹었어.”
“왜요?”
“잤어.”
“아침에는 깨어 있었잖아요. 설마 그때부터 지금까지요?”
“응.”
“어제 밤샜습니까?”
“곡.”
“곡 작업이요?”
“비슷한 거.”
비슷한 거.
신휘는 대답이 길어질 것 같으면 늘 그렇게 뭉갰다.
음악 하냐고 물으면 비슷한 거. 작곡가냐고 물으면 비슷한 거. SHINHWI와 신휘 중 어느 쪽이 진짜냐는 말을 하면 비슷한 거. 내 집이 식당이냐고 물으면 비슷한 거. 본인 다키마쿠라를 왜 안고 뒹구느냐고 물어도 아마 비슷한 거라고 할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슷하지 않은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설명하기 귀찮은 모든 것이 비슷한 거였다.
“냉장고에 뭐 있습니까?”
“초코우유.”
“그건 식사가 아닙니다.”
“맛있어.”
“맛있다고 식사가 되는 건 아닙니다.”
“젤리.”
“그것도 아닙니다.”
“케이크.”
“그건 애매하지만 오늘은 허용하겠습니다.”
“에너지드링크.”
“그건 식사가 아니라 액체 도핑입니다.”
“말 어렵게 하지 마.”
“배달 앱 쓰세요.”
“비밀번호 몰라.”
“어제도 알려드렸잖아요.”
“자동 로그인 풀렸어. 휴대폰 고장이야.”
“그건 고장이 아닙니다. 그리고 메모하셨잖아요.”
“메모 어디 있는지 몰라.”
“…….”
내가 침묵하자 박 대리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급식소?
나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휘가 말했다.
“도윤.”
“네.”
“퇴근하고 급식소.”
“제 집을 시설명으로 부르지 마세요.”
“그럼 도윤 집.”
“그건 맞습니다.”
“라면.”
“그건 메뉴잖아요.”
“응.”
“오늘도 라면입니까?”
“응.”
“신 씨, 사람은 라면과 초코우유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데.”
“그건 생존이지 생활이 아닙니다.”
“비슷한 거.”
“안 비슷합니다.”
전화 너머에서 신휘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짧고 낮았다.
내 방에서 MY STAGE를 부르던 사람. 검은 레이스와 붉은 조명 속에서 세계를 지배하던 사람. 그리고 지금 초코우유와 라면으로 하루를 버티려는 사람.
같은 사람이다.
이게 아직도 가끔 믿기지 않았다.
“주말에 시간 비워.”
신휘가 갑자기 말했다.
“왜요?”
“연습.”
“누구 연습이요?”
“나.”
“그런데 제가 왜요?”
“와.”
“그러니까 제가 왜요?”
“오면 편해.”
나는 잠깐 말을 잃었다.
저 말은 정말 위험했다.
신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오면 편해.
그 안에 특별한 의미가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아마 신휘에게 나는 배달 앱 비밀번호를 기억하고, 라면 물 양을 맞추고, 갑자기 꺼진 노트북을 다시 켜주고, 위험한 상자를 열어도 끝까지 사회적 생명만 걱정하는 편리한 인간일 것이다.
그런데도, 들으면 곤란하다.
“신 씨.”
“응.”
“그런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오해해?”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요.”
“다른 도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아니잖아요. 제가 고정됐는데요?”
“맞잖아.”
“아닙니다.”
“거짓말.”
나는 박 대리를 봤다.
박 대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
배신자.
“일단 일정 확인해보겠습니다.”
“응.”
“그런데 연습실에 제가 가도 됩니까?”
“응.”
“소속사에서 허락했습니까?”
“아마.”
“아마면 안 됩니다.”
“유경이 도윤 알아.”
“아는 사람이라는게 출입 허가증이 아닙니다. 한유경 매니저님께 확인하세요.”
“귀찮아.”
“확인하세요.”
“도윤이 해줘.”
“저는 매니저가 아닙니다.”
“비슷한 거.”
“전혀 안 비슷합니다.”
전화가 끊겼다.
항상 이렇다.
자기 할 말이 끝나면 끊는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박 대리가 조용히 박수를 쳤다.
“대단하네요.”
“무엇이요.”
“서도윤 씨가 퇴근 후 급식소 운영과 주말 동행을 동시에 배정받는 과정이요.”
“운영하지 않습니다.”
“운영 중인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라면 재고 관리하죠?”
“그건…….”
“초코우유 식사 금지하죠?”
“그건…….”
“배달 앱 비밀번호 기억하죠?”
“…….”
박 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급식소 맞네요.”
“회사에서까지 죽이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대신 공식 명칭은 쓰지 않겠습니다.”
“공식 명칭이 뭔데요.”
“그 분 전용 급식소.”
“대리님.”
“농담입니다.”
“진심 80퍼센트 섞여 있었습니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정말 인생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날 퇴근 후, 나는 결국 라면을 끓였다.
내 집에서.
내 냄비로.
내 라면을.
두 봉지를.
신휘는 식탁 앞에 앉아 초코우유 팩을 양손으로 잡고 있었다.
다키마쿠라는 방 안쪽에 있었다.
처음에는 다시 상자에 넣으려 했다.
실패했다.
신휘는 이렇게 말했다.
“봉인 풀렸잖아.”
“봉인이 풀렸다고 계속 재난 상태를 유지할 필요는 없습니다.”
“편한데.”
“편함은 법적 근거가 아닙니다.”
“실내용.”
“그 말이 점점 무섭습니다.”
결국 나는 타협했다.
외부에 보이지 않을 것. 사진 찍지 않을 것. 방송이나 화상 회의가 켜질 때는 반드시 치울 것. 무엇보다, 내가 회사 사람을 집에 데려올 가능성이 0.0001퍼센트라도 생기면 즉시 숨길 것.
신휘는 그 조건을 듣고 말했다.
“도윤 친구 없어?”
“조건을 이상하게 해석하지 마세요.”
“회사 사람도 안 오잖아.”
“안 오는 게 아니라 못 오게 된 겁니다.”
“왜.”
“이 방에 신휘 씨 다키마쿠라가 있으니까요.”
“전부터 있었잖아.”
“상자 안에 있는 것과 펼쳐져 있는 것은 다릅니다.”
“어렵네.”
“정말 어렵습니다.”
신휘는 초코우유 빨대를 입에 문 채 나를 보았다.
짧은 흑발은 대충 말라 있었고, 헐렁한 검은 티셔츠는 한쪽 어깨가 살짝 내려가 있었다. 창백한 피부와 무심한 눈.
무대 위 SHINHWI라면, 저런 자세 하나도 계산된 이미지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배고픈 사람이다.
아마도.
“계란 넣습니까?”
“응.”
“치즈는요?”
“응.”
“김치는요?”
“싫어.”
“왜요?”
“맛이 시끄러워.”
나는 라면 봉지를 뜯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맛이 시끄럽다는 표현은 처음 듣습니다.”
“시끄러워.”
“알겠습니다. 김치는 빼겠습니다.”
“기특해.”
“그 말도 금지하고 싶습니다.”
신휘는 대답 대신 초코우유를 마셨다.
나는 물이 끓는 냄비를 보며 생각했다.
이게 대체 뭘까.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내 집은 평범했다.
퇴근하고 돌아와 불을 켜고, 편의점 도시락이나 라면을 먹고, SHINHWI 영상을 틀어두고, 내 방에 있는 포스터를 보며 하루를 정리하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SHINHWI가 내 식탁에서 초코우유를 마시고 있다.
그리고 내 라면을 기다린다.
아니, 라면만 기다리는 게 아니다.
이 사람은 내 집을 급식소처럼 쓰고 있다.
내 방을 대기실처럼 쓰고 있다.
심지어 본인 등신대 다키마쿠라를 휴식용 쿠션처럼 쓰고 있다.
신휘는 냄비를 보며 말했다.
“도윤.”
“네.”
“주말에 와.”
“연습실 말이죠?”
“응.”
“제가 가서 뭘 합니까?”
“봐.”
“연습을요?”
“응.”
“왜요?”
“네가 보면 좋아.”
나는 젓가락을 놓칠 뻔했다.
“누가요?”
“나.”
“…….”
이 사람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나쁘다.
아니, 나쁘다는 표현은 틀렸다. 의도가 없다. 그래서 더 나쁘다.
“신휘 씨.”
“응.”
“그런 말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도윤만.”
“왜 저만 혼란스럽다고 확신합니까?”
“지금 혼란스럽잖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신휘는 아주 작게 웃었다.
“재밌어.”
“저는 재미없습니다.”
“거짓말.”
“그 단어도 금지 목록에 넣겠습니다.”
물이 끓었다.
나는 면을 넣었다.
신휘가 식탁 위에 턱을 괴고 냄비를 보았다.
눈이 조금 반짝였다.
무대 조명보다 라면 냄비를 볼 때 더 솔직하게 반짝이는 사람.
그걸 보고 있으면, 가끔 내가 좋아했던 SHINHWI가 정말 같은 사람인지 헷갈린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다.
그게 이상하고, 무섭고, 조금은 즐겁다.
“주말에요.”
나는 말했다.
“한유경 매니저님께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응.”
“확인 안 되면 안 갑니다.”
“올 거잖아.”
“왜 그렇게 확신합니까?”
“도윤은 와.”
나는 라면 스프를 넣다 말고 멈췄다.
신휘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말은 이상하게 박혔다.
도윤은 와.
명령도 아니고, 부탁도 아니고, 예언도 아닌 말.
그냥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의 말.
나는 냄비를 저었다.
“그렇게 당연하게 말하지 마세요.”
“왜.”
“제가 진짜 갈 것 같잖아요.”
“올 거잖아.”
나는 한숨을 쉬었다.
반박하지 못했다.
그게 제일 문제였다.
토요일 아침.
나는 휴대폰 벨소리에 눈을 떴다.
알람보다 먼저 울린 전화였다.
화면에는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한유경 매니저.
나는 놀라지 않았다.
한 달이면 사람은 많은 것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익숙해지면 안 되는 것에도 익숙해진다.
“네, 서도윤입니다.”
“주말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한유경 매니저의 목소리는 정중했다.
그리고 피곤했다.
“혹시 신휘 씨와 같이 계십니까?”
나는 반사적으로 방 안을 보았다.
다키마쿠라는 방 구석에 있었다.
신휘는 없었다.
다행이다.
아니, 다행이라는 기준이 이상하다.
“아직은 아닙니다.”
“아직은, 이군요.”
그녀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 복귀 라이브 리허설 첫날입니다. 오전 열 시까지 연습실 도착인데,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시계를 봤다.
10시 12분.
“왜 본인이 아니라 저한테 전화하십니까?”
“해보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토요일 오전 열 시, 옆집 신 씨에게는 무리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휘 씨가 어제 ‘도윤이랑 갈 거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동의한 적 없습니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일정에 들어갔습니까?”
“들어갔습니다.”
“왜요?”
“신휘 씨가 그렇게 말하셨으니까요.”
“그게 NOVA LINE의 일정 관리 시스템입니까?”
“저희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NOVA LINE과 한유경은 안전가옥에 있을 것을 원했을 것이다.
범인이 체포되고 사건이 일단락된 지금, 당분간 상주하던 보안 요원도 철수한 이곳에 계속 있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철수했다는 것부터가 안전해졌다는 반증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어쩌면 NOVA LINE이나 한유경에게는 내 존재가 신휘 씨의 막무가내를 받아주는 원흉 비슷한 것으로 보이지 않을까.
“제가 옆집 확인해보겠습니다.”
나는 옆집의 지금까지도 자고 있을 것이 뻔한 사람과 다르게 책임을 질 줄 아는 어른이다.
내 잘못이 아닌 것 같긴 해도 상대가 그렇게 느낄 수 있다면 최소한의 책임을 질 줄 안다는 점에서 인간 문명에 잘 적응했다고 할 수 있다.
“감사합니다.”
“다만 한 가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네.”
“저는 공식 스태프가 아닙니다.”
“네.”
“보호자도 아닙니다.”
“네.”
“매니저도 아닙니다.”
“네.”
“그런데 왜 자꾸 그 셋의 중간 어딘가로 쓰이는 것 같죠?”
책임감 있는 어른도 선을 그을 줄 알아야 한다.
한유경 매니저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서도윤 씨가 제일 연락이 잘 됩니다.”
“그건 이유가 아니라 비극입니다.”
“동의합니다.”
동의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전화를 끊고 나는 옆집으로 갔다.
초인종을 눌렀다.
반응 없음.
한 번 더 눌렀다.
역시 반응 없음.
나는 문 앞에서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았다.
열렸다.
“…….”
침착하자.
문이 열려 있었던 건 아니었다.
잠기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는 깊게 숨을 쉬고 안으로 들어갔다.
“신휘 씨.”
집 안은 어두웠다.
커튼은 반쯤 닫혀 있었고, 책상 위 모니터만 켜져 있었다. 화면에는 음악 작업 프로그램이 열려 있었고, 파형과 트랙 이름들이 어지럽게 늘어서 있었다.
바닥에는 구겨진 종이컵, 빈 초코우유 팩, 기타 피크, 그리고 분명 어제도 본 것 같은 후드티가 있었다.
침실 쪽으로 가자, 신휘는 침대 위에 엎어져 있었다.
이불은 반쯤 바닥으로 흘러내렸고, 짧은 흑발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한 손은 베개 아래에 들어가 있었고, 다른 손에는 아직도 펜이 쥐어져 있었다.
나는 침대 옆에 섰다.
“신 씨.”
“…….”
“연습 시간입니다.”
“…….”
“한유경 매니저님 전화 왔습니다.”
“…….”
“급식소 문 닫았습니다. 라면 없습니다.”
신휘의 눈이 열렸다.
역시.
“뭐?”
“일어나셨군요.”
신휘는 반쯤 뜬 눈으로 나를 봤다.
“급식소 닫아? 라면은?”
“안 닫았습니다.”
“거짓말했어?”
“효과적인 모닝콜이었습니다.”
“치사해.”
“연습 시간에 늦는 쪽이 더 치사합니다.”
신휘는 이불을 끌어올렸다.
“5분.”
“안 됩니다.”
“3분.”
“흥정하지 마세요.”
“1분.”
“숫자가 줄어도 신뢰가 생기지 않습니다.”
신휘는 나를 빤히 봤다.
잠이 덜 깬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로도 묘하게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예쁨이 있었다.
짜증난다.
아니, 내가 왜 짜증나지.
“시간과 타협하다가 문 열고 주무신 거죠?”
“응, 나가다가 다시 들어왔어.”
“왜요?”
“뭐 두고 와서.”
“그리고요?”
“5분만.”
역시.
“도윤.”
“네.”
“너 요즘 익숙해졌지.”
“무엇에요?”
“나.”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익숙해졌다.
인정하기 싫지만 익숙해졌다.
이건 인간으로서 실패한 걸까, 이웃으로서 성장한 걸까.
“부정하고 싶지만 그렇습니다.”
“기특하네.”
“칭찬하지 마세요. 구조적으로 잘못된 상황입니다.”
신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흰 티셔츠가 한쪽 어깨에서 조금 내려가 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끌어올리고, 바닥에 떨어진 검은 티셔츠를 집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뭐해?”
“예의입니다.”
“이제 와서?”
“지켜야 할 선은 있습니다.”
“도윤 방엔 나 거의 벗은 거 있잖아.”
나는 그대로 굳었다.
“그 이야기를 여기서 하지 마세요.”
“왜.”
“지금 제가 고개를 돌린 의미가 사라집니다.”
“앞뒤 다 봤잖아.”
“신 씨.”
“응.”
“그건 인쇄물입니다.”
“내 얼굴인데.”
“그래서 문제라고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
“도윤은 이상해.”
“정상입니다.”
“이상한 정상.”
“그건 좀 맞는 말 같아서 싫습니다.”
신휘는 세면대로 가며 말했다.
“같이 가.”
“네. 알고 있습니다.”
“진짜?”
“제 동의 없이 일정에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역시.”
“역시가 아닙니다.”
“편해.”
“그 말도 그만하세요.”
“왜?”
“여러 가지로 곤란합니다.”
신휘는 칫솔을 입에 물고 나를 봤다.
“오해해?”
“안 합니다.”
“거짓말.”
“그 단어도 이제 금지하고 싶습니다.”
신휘는 대답 대신 양치질을 했다.
나는 거실 쪽으로 나와 바닥에 떨어진 종이들을 정리했다.
가사 메모였다.
글씨는 의외로 단정했다.
낙서처럼 보이다가도, 어떤 문장은 칼처럼 박혀 있었다.
my stage is not your screen don’t name me with your hunger 내가 선 무대는 네가 훔친 방이 아니야
나는 손을 멈췄다.
아마 새 곡의 일부일 것이다.
한 달이 지나도, 그 사건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다.
신휘는 그것을 붙잡고 울지 않았다. 그렇다고 잊은 것도 아니었다.
노래로 만들고 있었다.
그게 신휘였다.
“도윤.”
“네.”
“그거 봤어?”
나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바닥에 떨어져 있어서.”
“괜찮아.”
신휘는 젖은 얼굴을 수건으로 대충 닦으며 나왔다.
“어때?”
“무섭네요.”
“좋은 뜻?”
“신휘 씨 노래 기준으로는요.”
“그럼 됐어.”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그게 이상하게 무거웠다.
무대 위 SHINHWI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구나.
생활력은 없고, 밥은 안 먹고, 분리수거도 못 하는데.
자기 무대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 정확하다.
“아침은요?”
신휘가 물었다.
“가면서 초코우유 사겠습니다.”
“초코우유?”
“네. 지금 급식소 영업은 어렵습니다.”
“치사해.”
“연습 시간입니다.”
“라면.”
“연습 끝나고요.”
“도윤 집?”
“제 집을 최종 목적지처럼 말하지 마세요.”
“목적지 맞잖아.”
“아닙니다.”
“비슷한 거.”
“그 말은 만능키가 아닙니다.”
신휘는 검은 티셔츠를 입고, 대충 머리를 눌렀다. 모자를 찾다가 실패했고, 대신 선글라스를 집었다.
“그거 찾으신 겁니까?”
“응.”
“어디 있었습니까?”
“냉장고.”
나는 눈을 감았다.
“왜 선글라스가 냉장고에 있습니까?”
“시원해.”
“선글라스는 숙성식품이 아닙니다.”
“인간 문명 어렵네.”
“그건 문명 문제가 아니라 신휘 씨 문제입니다.”
신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문을 열고 나가며 말했다.
“초코우유.”
“네.”
“큰 거.”
“네.”
“라면도 사?”
“라면은 제 집에 있습니다.”
신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역시가 아닙니다.”
“급식소 좋아.”
나는 문을 잠그다 말고 멈췄다.
“신 씨.”
“응.”
“그런 말도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또?”
“또입니다.”
신휘는 아주 작게 웃었다.
“재밌어.”
재밌지 않다.
정말로.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같이 웃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신휘는 초코우유 큰 팩을 골랐다.
정확히는 제일 큰 걸 골랐다.
“그거 다 드실 겁니까?”
“응.”
“아침 대용 아닙니다.”
“초코우유는 강해.”
“음료에 그런 평가를 하지 마세요.”
“라면보단 약해.”
“비교군이 이상합니다.”
계산대 직원은 신휘를 한 번 봤다가, 다시 봤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설마 진짜 SHINHWI가 토요일 오전 편의점에서 초코우유를 들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결제를 하려다가 멈췄다.
“신 씨 카드는요.”
“없어.”
“왜요?”
“두고 왔어.”
“지갑은요?”
“귀찮아서.”
나는 아무 말 없이 내 카드로 결제했다.
신휘는 초코우유에 빨대를 꽂으며 말했다.
“기특해.”
“나중에 청구하겠습니다.”
“응.”
“정말요?”
“아마.”
“그 아마는 안 주겠다는 뜻 아닙니까?”
신휘는 초코우유를 마셨다.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영수증을 지갑에 넣었다.
언젠가 이 사람에게 청구할 수 있을까.
아마 못 할 것이다.
이것도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위험한 징조다.
NOVA LINE MUSIC 지하 연습실 앞에 도착했을 때, 안쪽에서 드럼 소리가 들렸다.
짧고 정확했다.
쿵. 탁. 쿵쿵. 탁.
신휘는 초코우유를 한 손에 들고 문 앞에 섰다.
나는 그녀 옆에 섰다.
갑자기 긴장이 됐다.
“왜?”
신휘가 물었다.
“조금 긴장됩니다.”
“왜.”
“신휘 씨 밴드 멤버들을 처음 만나는 거니까요.”
“전속 세션.”
“말만 그런 거 아닙니까? 사실 밴드잖아요.”
신휘는 잠시 생각했다.
“비슷한 거.”
그럴 줄 알았다.
“그리고.”
나는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저는 그분들에게 어떤 사람인지도 애매하고요.”
신휘가 나를 봤다.
“도윤은 도윤이지.”
“그 설명은 너무 신휘 씨답게 짧습니다.”
“틀렸어?”
틀리진 않았다.
하지만 충분하지도 않았다.
도윤은 도윤.
팬. 옆집 사람. 급식소남. MY STAGE 방구석 라이브 카메라맨. 가짜 복귀 방송을 막으러 간 일반인. NOVA LINE 서류상 비공식 현장 협조자 비슷한 무언가. 그리고 본인 다키마쿠라를 본인이 끌어안고 뒹구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
내 정체성은 최근 한 달 사이에 너무 많이 늘어났다.
신휘는 초코우유 빨대를 문 채 문고리를 잡았다.
“들어가.”
“네.”
문이 열렸다.
드럼 소리가 멈췄다.
안쪽의 시선들이 우리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SHINHWI의 세계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