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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폐 아이돌님은 옆집에 살고 계셔 / 1권 / Chapter 16

CHAPTER 16: 옆집 여자는 무대를 말한다

폐극장에서 발견한 초코우유 팩을 단서로 신휘를 기다리는 도윤. 예고된 방송의 시간이 다가오고, 남이 만든 무대 위에서 신휘는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옆집 여자는 무대를 말한다

초코우유 팩이었다.

찌그러진 작은 종이팩.

빨대가 아직 꽂혀 있었다.

어디서나 파는 것.

누가 마셨는지도 모르는 것.

며칠 전부터 저기 있었을 수도 있는 것.

경찰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알았다.

아니.

안다고 믿었다.

우리 집 식탁.

라면 옆.

신 씨 손.

라면값이라고 내밀던 것.

처음 만난 날 내가 씻어서 종이로 분리하라고 알려줬던 것.

초코우유가 있었다.

여기에 신 씨가 있다.

휴대폰 화면에서는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00:10:57

56.

55.

54.

그때 무전 하나가 현장의 공기를 바꿨다.

— 배상철 소재 확인.

경찰 몇 명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 금일 오전 렌터카 이용 기록 확인. 차량 현재 평택 소재 공단 인근에서 확인됐습니다.

평택.

나는 한유경을 봤다.

그녀는 나를 보지 않았다.

분명 무전을 들은 듯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귀를 기울였다.

— 차량 이동 시각, 실종 추정 시간과 부합.

잠깐의 정적.

곧 지시가 떨어졌다.

— 확인 완료된 후보지 인원 평택으로 전환.

— 평택서 협조 요청.

— 배상철 신병 우선 확보.

이상한 판단이 아니었다.

아니.

냉정하게 생각하면 당연한 판단이었다.

오늘 현장에 있었던 사람.

안전가옥 이동 정보를 알았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

실종 직전까지 아파트에서 확인된 사람.

연락이 끊긴 사람.

한유경도 강력한 용의자로 생각하고 행적 파악을 요청한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빌린 차량이, 신 씨가 사라진 뒤 이동할 수 있는 시간 안에 평택 공단에서 확인됐다.

누가 봐도 그쪽이었다.

내가 경찰이어도 그쪽을 먼저 볼 것이다.

그런데 초코우유가 있었다.

나는 창밖을 봤다.

폐극장 옆문.

문 아래로 새는 빛.

건물 뒤의 흰색 승합차.

그리고 바닥의 초코우유.

“여기는요?”

내가 물었다.

내 앞에 있던 경찰은 나를 보았다.

“현장 확인은 계속합니다.”

말은 짧았다.

“다만 현재로서는 평택 쪽이 더 유력합니다.”

그 말도 맞았다.

맞아서 더 무서웠다.

한유경이 말했다.

“이곳 확인은 끝까지 부탁드립니다.”

경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하고 있습니다.”

짜증도 없었다.

무시도 아니었다.

그들은 실제로 확인하고 있었다.

옆문.

후문.

승합차.

전기.

내부 인기척.

다 보고 있었다.

다만.

00:08:44

시간이 없었다.

평택으로 간 인력은 여기로 돌아올 수 없다.

추가 인원이 온다고 해도, 방송이 먼저 시작될 수 있다.

초코우유가 있다.

나는 그것만 생각했다.

초코우유.

초코우유.

초코우유.

미친 것 같았다.

사람이 납치됐는데 나는 초코우유 하나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내가 아는 옆집 여자 신 씨였다.

경찰에게는 쓰레기.

나한테는 신 씨.

무전이 이어졌다.

— 폐극장 옆문 내부 광원 확인.

— 후문 잠금.

— 내부 남성 음성 복수.

— 피해자 여부 미확인.

— 승합차 조회 계속.

현장의 경찰들은 떠나지 않았다.

이곳의 경찰들은 이곳 현장 역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폐극장일 건물에 승합차가 발견됐고, 건물 내부에 불이 켜져 있고, 인기척이 있다.

평택에 유력 용의자의 행적이 확인됐다 하더라도, 이곳의 확인이 끝날 때까지 경찰은 떠나지 않을 것이다.

매우 상식적으로 정확한 경찰의 대응에 안심을 해야 할 나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곳의 경찰은 내 불안감 탓도 있겠지만, 숫자가 적었다.

다른 후보지를 확인하고 끝낸 인력은 이미 평택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그리고 내 불안감이 적중한 듯, 현장을 확인 중인 경찰의 판단이 이어졌다.

추가 지원 요청 무전이 들려왔다.

— 폐극장 증원 요청.

잠시 뒤 답이 왔다.

— 예상 12분.

나는 휴대폰을 봤다.

00:07:52

12분.

방송까지는 8분도 남지 않았다.


그때 극장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는 보지 못했다.

나중에 압수된 영상.

범인들의 진술.

경찰이 확보한 장비의 녹화 파일.

그리고 신 씨가 나중에 아주 조금씩 말해준 것.

그걸 맞추고 나서야 알았다.

알게 된 뒤에는, 차라리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폐극장의 무대는 싸구려였다.

Velvet Inferno를 흉내 냈다.

붉은 셀로판지를 덮은 공업용 조명.

바닥에 대충 깐 검은 천.

플라스틱 체인.

종이 장미.

낡은 객석에는 검은 천을 덮어 사람의 형체처럼 만들어놨다.

진짜 Velvet Inferno 무대에 있던 건 거의 다 있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압도감도.

위험함도.

퇴폐도.

신휘도.

껍데기만 있었다.

붉은색.

검은색.

체인.

노출.

범인들이 이해한 SHINHWI는 그 정도였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신휘가 의자에 묶여 있었다.

손목과 발목은 고정돼 있었다.

손목에는 이미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입가 한쪽도 조금 터져 있었다.

원래 입고 있던 옷은 아니었다.

Velvet Inferno의 의상을 흉내 낸 싸구려 옷.

붉은 천.

검은 끈.

불필요하게 드러나는 피부.

신휘가 골랐던 무대의상에서는 노출조차 연출의 일부였다.

어디를 보여주고.

어디를 가리고.

어디로 시선을 끌고.

언제 카메라가 접근할지.

전부 신휘가 알고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그냥.

남이 입힌 옷이었다.

그저 욕망을 자극하기 위해 보여주는 옷이었다.

권민석은 그 모습을 카메라로 보고 있었다.

마른 몸.

창백한 얼굴.

낡은 검은 재킷.

손목에는 오래된 SHINHWI 팬밴드가 감겨 있었다.

정우람은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캡처보드.

믹서.

웹캠.

메인 카메라.

보조 카메라.

그의 손만 바빴다.

얼굴은 계속 문 쪽으로 향했다.

“7분.”

정우람이 말했다.

권민석은 모니터만 봤다.

“미러?”

“다 열어놨어.”

“좋아.”

“진짜 경찰 오면?”

권민석이 대답하지 않았다.

무대 한쪽에서 임동수가 웃었다.

“오면 뭐.”

그는 신휘를 보고 있었다.

SHINHWI에는 별 관심이 없는 눈이었다.

앨범도.

무대도.

음악도.

아무것도 모른다.

알고 싶은 마음도 없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묶여 있는 여자였다.

그에게는 그저 묶여 있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래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유명한 여자였다.

그 시선이 신휘의 몸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신휘는 피하지 않았다.

겁이 없었던 건 아니다.

손끝은 차가워져 있었고.

등은 굳어 있었다.

숨을 너무 깊게 쉬면 묶인 손목이 더 당겼다.

그래도 나중에 신 씨가 조금 이야기해 준 것에 따르면 그 시선만큼은 피하기 싫었다고 한다.

임동수가 말했다.

“뭘 봐.”

신휘는 잠깐 그를 봤다.

“싸구려.”

임동수의 표정이 멈췄다.

“뭐?”

“너.”

그리고 시선이 옆으로 움직였다.

붉은 조명.

플라스틱 체인.

종이 장미.

“여기도.”

권민석이 고개를 돌렸다.

“뭐?”

신휘가 말했다.

“구려.”

권민석의 얼굴이 굳었다.

“닥쳐.”

“무대.”

“닥치라고.”

“진짜 구려.”

임동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권민석은 웃지 않았다.

“넌 아직도 모르네.”

그가 신휘 앞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이 네 진짜 모습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어.”

신휘는 그를 봤다.

“진짜?”

“그래.”

“이게?”

신휘가 자기 어깨에 억지로 걸쳐진 붉은 천을 내려다봤다.

다시 무대를 봤다.

그리고 다시 반문했다.

“이게?”

“나는 알아.”

신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가?”

신휘가 정말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물었다.

“네가 무대에서 보여준 건 전부가 아니야.”

잠깐.

신휘가 웃었다.

즐거워서 나온 웃음은 아니었다.

“내가 만든 무대야.”

권민석의 눈이 흔들렸다.

“뭐?”

“Velvet Inferno.”

신휘가 말했다.

“내가 만들었어.”

“그건 전부가 아니야. 규제와 회사의 방침이—”

“내 무대야.”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 옷.”

조명.

“내 조명.”

카메라.

“내 카메라.”

그리고 권민석.

“내가 고른 만큼 보여준 거야.”

권민석은 입을 다물었다.

신휘가 물었다.

“근데 이건 누가 골랐어?”

대답은 없었다.

“내 생각도, 내 의도도 모르는 너야.”

신휘가 말했다.

“그러니까.”

한 박자.

“가짜.”

권민석의 입술이 떨렸다.

신휘는 위험하다는 걸 알았다.

저 사람이 지금 화가 났다는 것도 안다.

조용히 있으면 적어도 맞거나 상해를 당할 일은 피할지도 모른다.

시키는 대로 하면 조금 덜 위험할지도 모른다.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싫었다.

무섭다는 이유로 저걸 자기 무대라고 인정하는 건.

죽어도 싫었다.

권민석이 말했다.

“내가 널 얼마나 봤는데.”

목소리가 갈라졌다.

“앨범 다 샀어. 공연도 갔고. 영상도 전부 봤어. 인터뷰도. 사진도. 비공개 자료도 악착 같이 찾아서—”

“그래서?”

“내가 모르는 게 뭔데.”

신휘가 그를 봤다.

“나.”

권민석이 굳었다.

“뭐?”

“나를 모르잖아.”

“내가 너를—”

“본 적 없어.”

“닥쳐. 난 네 모든 것을 보고 알고 있어.”

“네가 본 건 단지 네가 보고 싶은 거야.”

“닥치라고.”

“그걸 보고.”

신휘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나를 안다고 생각했어?”

권민석이 손을 들었다.

찰싹.

신휘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이미 터진 입술에서 피가 조금 더 번졌다.

정우람이 움찔했다.

임동수는 웃었다.

“야, 나보고는 건드리지 말라며?”

신휘는 몇 초 동안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고개를 돌렸다.

권민석을 봤다.

“고작 그거야?”

권민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번에는 임동수가 앞으로 나왔다.

“야.”

그가 신휘의 턱을 거칠게 잡았다.

“그만 잘난 척해.”

신휘가 얼굴을 돌리려 했지만 손이 더 세게 들어왔다.

“놓으라고.”

“방송 시작하면.”

임동수가 입을 가까이 가져왔다.

숨에서 담배 냄새가 났다.

“네 안쪽도 잘났는지 한번 보자.”

손이 신휘의 어깨 위 붉은 천을 움켜쥐었다.

거칠게 당겼다.

얇은 천이 한쪽으로 비뚤어졌다.

신휘의 몸이 굳었다.

권민석이 바로 말했다.

“아직 건드리지 마.”

임동수가 돌아봤다.

“뭐?”

“방송 전에는.”

“아까부터 씨발.”

임동수가 신휘에게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얼굴 치지 마라. 옷 건드리지 마라. 기다려라. 내가 그 말만 들으려고 네 일을 해주는 것 같아?”

“화면 망가지면 안 돼.”

“네, 여신님 아주 귀하게 모셔야겠네.”

임동수가 권민석을 비꼬며 한 발 물러섰다.

이 일을 주도하고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은 권민석이었다.

자기 안에 만들어낸 SHINHWI의 모습을 현실에 구현하고 싶다는 욕망이 여기까지 끌고 왔다.

신휘가 권민석을 봤다.

그 순간, 혐오보다 먼저 든 감정은 분노였다.

“너.”

권민석이 그녀를 봤다.

“네가 한 것은 구려.”

“닥쳐.”

“나 좋아하는 팬.”

권민석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사랑하는 팬.”

“닥쳐.”

“사랑하면, 팬이라면.”

신휘가 잠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떠오른 이미지, 팬. 진짜 팬.

눈을 뜬 신휘가 말했다.

“훔치지 않아.”

정적.

“무대도.”

권민석의 손이 떨렸다.

“이름도.”

“닥쳐.”

“몸도.”

“닥치라고!”

권민석이 소리쳤다.

권민석의 모습을 본 임동수가 웃었다.

신휘는 멈추지 않았다.

“내 거야.”

짧았다.

“전부.”


폐극장 밖.

무전이 빨라졌다.

— 내부에서 여성 음성 가능성.

나는 몸을 굳혔다.

한유경도 고개를 들었다.

— 다시 확인.

몇 초.

내 심장이 귀에서 뛰었다.

— 여성 음성 재확인.

경찰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 피해자 존재 가능성 높음.

— 현장 진입 준비.

나는 문 손잡이를 잡았다.

한유경이 내 팔을 잡았다.

말하지 않았다.

나도 열지 않았다.

아직.

휴대폰.

00:05:51

대기자 수.

48,771명

채팅창.

5분 남음 온다 녹화 켬 진짜 SHINHWI냐 얼굴부터 인증 노모 가자 진짜 납치면 존나 큰일인데 경찰이 알아서 하겠지 일단 켜라 SHINHWI 원래 저런 이미지잖아 싫으면 그런 컨셉 왜 함 본인이 팔았으면 감수해야지ㅋㅋ

나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

마지막 문장.

감수해야지.

머리가 뜨거워졌다.

뭘.

뭘 감수해야 하는데.

무대에서 노출을 선택하면, 남이 벗겨도 되는 건가.

무대에서 욕망을 연기하면, 남이 욕망을 강요해도 되는 건가.

신 씨가 자기 이미지를 직접 골랐다는 이유로.

이제 선택권이 없어지는 건가.

손이 떨렸다.

휴대폰을 쥔 손이 부들거렸다.

“보지 마세요.”

한유경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나는 화면을 껐다.

무전이 들렸다.

— 후문 잠금 절단 준비.

— 옆문 진입 각도 불량.

— 내부 인원 최소 세 명.

— 증원 예상 7분.

7분.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00:04:26

나는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7분.

시간이 없었다.

경찰은 이미 할 수 있는 걸 하고 있었다.

저들도 그걸 안다.

예상보다 빠르게 준비하고 있다고 해도 시간 안에 증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걸.

그래서 지금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준비라는 말 자체가 미칠 것 같았다.

신 씨는 지금 저 안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무슨 일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제발.”

나도 모르게 말했다.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몰랐다.

“제발.”

한유경의 입술이 떨렸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안쪽.

카운트다운은 3분을 지나고 있었다.

정우람은 손을 떨면서 장비를 확인했다.

“메인 살아 있고.”

키보드.

“미러 둘.”

믹서.

“오디오.”

카메라.

“다 돼.”

임동수는 참을성이 끝난 얼굴이었다.

“이제 됐냐?”

권민석은 신휘를 보고 있었다.

“조금만.”

신휘가 웃었다.

아주 작게.

권민석이 눈을 찌푸렸다.

“왜 웃어.”

“너.”

“뭐.”

“끝까지.”

신휘가 말했다.

“네 안의 망상만 보고 있네.”

“닥쳐.”

“나는 안 보고.”

권민석이 성큼 다가왔다.

신휘가 말했다.

“너는 SHINHWI를 좋아한 게 아니야.”

권민석의 표정이 변했다.

“닥쳐. 난 내 꿈을 이루고 있어. 누구보다도 널 알고 네 모습을 사랑한다고.”

“네 망상 속에 진짜 나는 없어.”

“닥치라고!”

“그러니까.”

신휘의 눈은 피하지 않았다.

“너에게 난 필요 없어.”

권민석이 완전히 굳었다.

임동수가 말했다.

“야, 얘 말 맞네.”

권민석이 그를 노려봤다.

“닥쳐.”

“방송이고 뭐고 넌 적당히 네 여신 닮은 인형 가지고 놀고 이 건방진 년은 내가 받아 간다?”

“닥치라고!”

그 순간 임동수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사라졌다.

“너 지금 나한테 소리쳤냐?”

공기가 바뀌었다.

정우람이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신휘도 봤다.

권민석이 숨을 거칠게 쉬었다.

“당장 방송해.”

“뭐?”

“시작해.”

“아직 2분 남았는데.”

“상관없어.”

권민석은 신휘를 보고 있었다.

눈이 이미 망가져 있었다.

“진짜를 보여주면 돼.”

“진작 그럴 것이지.”

임동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말이 무슨 허락인지.

신휘도 알아들었다.

임동수가 다시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권민석이 막지 않았다.

정우람이 급히 기기를 다루기 시작했다.

신휘의 호흡이 짧아졌다.

도망갈 수 없다.

팔도.

다리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도 고개는 숙이지 않았다.

임동수의 손이 다시 붉은 천을 잡았다.

이번에는 더 거칠었다.

엉성하게 박음질된 천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당겨졌다.

“이제.”

그가 웃었다.

“좀 얌전해지나 보자.”


폐극장 밖.

00:01:17

나는 차에서 내려 있었다.

언제 내렸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마 갑자기 남은 시간이 줄어들었을 때였던 것 같다.

한유경도 옆에 있었다.

경찰이 우리 앞을 막고 있었다.

“더 뒤로 가십시오.”

우리는 뒤로 물러났다.

경찰 셋이 옆문 쪽에 붙었다.

다른 둘은 후문으로 돌았다.

무전.

— 피해자 위치 미확인.

— 내부 충돌음.

— 진입 준비.

그 순간.

안에서 뭔가 크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여자 목소리.

짧았다.

무슨 말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 한 걸음 나갔다.

경찰이 팔을 뻗었다.

“뒤로!”

멈췄다.

휴대폰.

00:00:49

48.

47.

46.

그때 옆문이 아주 조금 열렸다.

안쪽에서 누군가 열려고 한 건 아니었다.

문틈으로 빠져나온 여러 가닥의 케이블 때문에 완전히 닫히지 않았던 문이, 안쪽 충격에 밀려 조금 더 벌어진 것뿐이었다.

붉은 빛이 쏟아졌다.

그 틈으로 무대가 보였다.

아주 조금.

먼저 붉은색.

그다음 사람의 등.

그리고.

신 씨.

묶여 있었다.

의자에.

거의 벗은 거나 다름 없는 싸구려 옷차림으로.

한 남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몸을 숙이고 있었다.

손은 그 얼마되지 않는 신 씨 옷을 움켜쥐고 있었다.

신 씨 얼굴이 보였다.

입가에 피.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서도윤 씨!”

뛰었다.

진짜로.

그냥 뛰었다.

경찰이 팔을 잡으려 했다.

손끝이 옷을 스쳤다.

“안 됩니다!”

들렸다.

알았다.

안 되는 거.

경찰이 곧 들어간다는 것도.

내가 들어가봐야 도움 안 된다는 것도.

다 안다.

그런데.

신 씨를 봤다.

그걸로 끝이었다.

열린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등 뒤에서 한유경이 소리쳤다.

“서도윤 씨!”


00:00:31

내가 안으로 들어온 순간.

세 명이 나를 봤다.

임동수.

권민석.

정우람.

나중에 알게 된 그 사람들의 이름.

“뭐야!”

신 씨도 나를 봤다.

눈이 커졌다.

“도윤?”

그 한마디.

그거면 됐다.

살아 있다.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임동수가 내게 달려왔다.

나는 신 씨 쪽으로 가려고 했다.

한 걸음.

그걸로 끝났다.

가슴을 세게 밀렸다.

뒤로 넘어졌다.

바닥이 등에 부딪혔다.

숨이 통째로 빠졌다.

“컥.”

아팠다.

너무 아팠다.

일어나려고 했는데 임동수가 내 멱살을 잡았다.

“넌 뭐야, 씨발!”

주먹이 날아왔다.

얼굴 옆으로 충격이 왔다.

귀가 울렸다.

사람을 때려본 주먹이었다.

내가 액션 영화 주인공이면 여기서 반격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싸움 못 한다.

맞으면 아프다.

숨도 못 쉬겠다.

주먹이 또 올라갔다.

그때.

쾅.

뭔가 넘어졌다.

임동수가 고개를 돌렸다.

신 씨였다.

묶인 채로 몸을 비틀었다.

의자째 옆으로 기울어져 넘어지면서도 다리를 뻗었다.

발이 카메라 삼각대에 걸렸다.

삼각대가 쓰러졌다.

권민석이 비명을 질렀다.

“야!”

정우람도 카메라 쪽을 봤다.

찰나.

나를 보고 있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기어갔다.

신 씨에게?

아니.

처음엔 그랬다.

그런데 눈앞에 장비가 있었다.

노트북.

캡처보드.

믹서.

케이블.

그리고 화면.

00:00:19

채팅창이 폭발하고 있었다.

온다 19초 녹화 제발 진짜 얼굴 보여줘 시작한다

아.

이거다.

이걸 하려고 한 거다.

신 씨에게 무슨 짓을 하든.

이걸 보여주려고.

저 싸구려 무대를.

저질스러운 음탕한 모습을.

저들이 멋대로 만든 신휘를.

그걸 진짜라고 세상에 보여주려고.

나는 그런 SHINHWI를 보고 싶지 않다.

나는 그런 SHINHWI가 세상에 보이게 두고 싶지 않다.

나는 팬이니까.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SHINHWI라면.

내가 알고 있는 옆집 여자 신 씨라면.

그 생각이 떠오른 나는 방향을 틀었다.

장비 쪽으로.

정우람이 알아챘다.

“야!”

권민석도 소리쳤다.

그의 표정으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진짜 SHINHWI를 보고 있지 않다.

신휘를 보고 있지 않다.

옆집 신 씨가 어떤 사람인지 아무 것도 모른다.

“막아!”

임동수가 나를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등 위로 체급이 다른 몸이 올라왔다.

바닥에 얼굴이 눌렸다.

“어딜 가!”

짓눌리는 무게만으로도 숨이 안 쉬어졌다.

정말.

안 쉬어졌다.

나는 손을 뻗었다.

케이블.

뭐가 뭔지 몰랐다.

검은 선.

굵은 것.

얇은 것.

랜선.

전원.

뭔지 모르겠지만 그중 하나를 잡았다.

“놔!”

정우람이 소리쳤다.

00:00:10

신휘가 나를 봤다.

그녀도 장비를 봤다.

내 손을 봤다.

그리고 말했다.

“도윤.”

숨이 끊기는 것 같았다.

“선.”

그 한마디.

나는 웃을 뻔했다.

이 상황에서.

“네.”

소리가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00:00:07

임동수가 내 팔을 밟으려 했다.

신휘가 몸을 다시 틀었다.

묶인 의자가 바닥을 긁었다.

다리가 임동수의 종아리에 부딪혔다.

크게 다치게 할 정도도 아니었다.

그런데 균형이 한번 흔들렸다.

그거면 됐다.

나는 선을 두 손으로 잡았다.

당겼다.

안 빠졌다.

00:00:04

내가 영화나 만화,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멋지게 성공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생각을 할 겨를 같은 것은 없었다.

내 모습이 얼마나 엉망진창인지는 상관 없었다.

지금은 오직 단 하나의 생각만이 내 몸을 움직였다.

다시.

“이 새끼가!”

임동수가 내 어깨를 눌렀다.

손이 미끄러졌다.

놓칠 것 같았다.

신휘가 소리쳤다.

“도윤!”

나는 다시 잡았다.

00:00:02

한 번 더.

00:00:01

카메라 표시등이 켜졌다.

그것을 본 나는 정신을 잃을 것 같음을 느끼면서도 남은 온 힘을 쏟아 부어 손 끝에 닿은 선을 움켜 쥐었다.


라이브는 시작됐다.

쓰러진 카메라라 화면은 엉망이었다.

바닥.

붉은 빛.

검은 천.

사람의 다리.

넘어진 의자.

그리고.

몇 초.

신휘가 잡혔다.

결박된 손목.

비뚤어진 싸구려 의상.

입가의 피.

신휘는 카메라에 불이 들어온 걸 봤다.

그 순간.

신휘의 표정이 바뀌었다.

겁을 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당황한 표정도 아니었다.

억지로 웃지도 않았다.

그냥.

화가 난 얼굴이었다.

신휘가 렌즈를 봤다.

“이건.”

숨을 한번 삼켰다.

“내 무대가 아니야.”

채팅이 멈칫했다.

곧 폭발했다.

뭐야 묶여 있는데? 야 이거 진짜 SHINHWI잖아 뭐임 경찰 불러 저 남자 뭐야 SHINHWI 맞지? 얼굴에 피 나는데? 씨발 이거 범죄잖아 방송 끊어 범죄 보여달라고 했던거냐, 이 쓰레기들아

나는 움켜쥐는 것에 성공한 선을 당겼다.

툭.

빠졌다.

노트북 화면 하나가 멈췄다.

송출 표시가 꺼졌다.

화면이 검게 변했다.

그런데 오디오는 아직 살아 있었다.

신휘는 이 상황에 당황한, 그리고 망연자실한 권민석을 봤다.

“나는.”

“네 것이 아니야.”

그리고 곧 소리도 끊겼다.

그 순간.

바깥에서 고함이 터졌다.

“경찰입니다! 움직이지 마!”

옆문이 완전히 열렸다.

발소리가 쏟아졌다.

임동수가 내 등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다음은 빨랐다.

정말 빨랐다.

경찰은 들어오자마자 사람을 갈랐다.

한 명은 임동수.

한 명은 권민석.

한 명은 정우람.

다른 인원은 신휘 쪽으로 갔다.

“손 보여!”

“엎드려!”

“움직이지 마!”

임동수가 욕을 했다.

경찰 둘에게 바로 바닥에 눌렸다.

권민석은 뒤로 빠지려다가 붙잡혔다.

정우람은 노트북 앞에서 양손을 들었다.

“저는 연결만 했어요! 저는 진짜 연결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엎어진 채 숨만 쉬었다.

아팠다.

등.

어깨.

얼굴.

다 아팠다.

그런데 손은 아직 선을 쥐고 있었다.

경찰이 말했다.

“그거 놓으세요.”

나는 손을 봤다.

“아.”

놓았다.

케이블이 바닥에 떨어졌다.

툭.

정말 별것 아닌 소리였다.

신휘를 구한 건 내가 아니다.

범인을 잡은 것도 아니다.

싸워서 이긴 것도 아니다.

들어가자마자 맞았고, 눌린 채 버둥거렸다.

아마 옆에서 보면 꼴사나웠겠지.

내가 한 것은 단지 하나.

그냥 선 하나 뽑았다.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 선만큼은.

반드시 뽑고 싶었다.


현장이 확보된 뒤에야 한유경이 안으로 들어왔다.

신휘에게 뛰었다.

“신휘 씨.”

목소리가 처음부터 떨렸다.

구급대원이 신휘의 손목에 묶인 결박을 풀고 있었다.

한유경은 그 앞에서 멈췄다.

손을 뻗었다가.

어디를 만져야 할지 몰라 잠깐 허공에서 멈췄다.

“저 왔습니다.”

신휘가 고개를 들었다.

“응.”

한마디.

한유경의 얼굴이 무너졌다.

딱 한 번.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다시 매니저 얼굴을 만들었다.

코트를 받아 신휘 어깨 위에 덮었다.

“병원에 갈 겁니다.”

“응.”

“검사 다 받으셔야 합니다.”

“응.”

신휘는 힘이 없었다.

평소보다 목소리도 작았다.

그래도 눈은 열려 있었다.

결박이 풀렸다.

손목에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신휘는 자기 손목보다 먼저 무대를 봤다.

셀로판 조명.

검은 천.

플라스틱 체인.

종이 장미.

그리고.

“구려.”

한유경이 멈췄다.

“……네?”

신휘가 턱으로 무대를 가리켰다.

“저거.”

한유경이 무대를 봤다.

다시 신휘.

“네.”

입술이 떨렸다.

“정말 구립니다.”

신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잠깐.

“내 무대 아니야.”

“네.”

한유경은 바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제야 신휘가 나를 찾았다.

나는 경찰 옆 바닥에 앉아 있었다.

꼴이 엉망이었다.

셔츠에는 먼지가 묻었고.

입 안에서는 피 맛이 났고.

한쪽 볼은 벌써 뜨거웠다.

신휘와 눈이 마주쳤다.

“도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그제야 무서워졌다.

아까는 안 무서웠던 게 아니다.

생각할 틈이 없었다.

지금.

신 씨가 살아 있는 걸 확인하고 나니까.

손이 떨렸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현실감이 느껴졌다.

“……네.”

“왔네.”

나는 웃지도 못했다.

“네.”

그리고.

“신 씨.”

신휘가 나를 봤다.

“응.”

신 씨였다.

살아 있었다.

정말.

살아 있었다.

신휘의 시선이 바닥으로 내려갔다.

빠진 케이블.

다시 나.

“선.”

“네.”

“뽑았어?”

“네.”

나는 말했다.

“그건 뽑았습니다.”

신휘가 아주 조금 웃었다.

“기특해.”

그 말에 힘이 풀렸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버렸다.

한유경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신휘를 봤다가.

나를 봤다가.

다시 신휘를 봤다.

뭐라 말하려는 듯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휘는 다시 무대를 봤다.

싸구려 지옥.

자기 이름을 가져가 만든 가짜.

그리고 말했다.

“다음엔.”

나는 신휘를 봤다.

신휘도 나를 봤다.

“내가 정해.”

나는 잠깐 대답하지 못했다.

무대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알았다.

다음 무대.

다음에 카메라 앞에 설 때.

다음에 누군가에게 자기를 보여줄 때.

그건.

자기가 정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목소리가 갈라졌다.

“신 씨가 정하세요.”

신휘는 아주 작게 웃었다.

무대 위 SHINHWI의 웃음이 아니었다.

카메라를 향한 것도 아니었다.

신 씨.

그 호칭에 반응한 것처럼.

라면을 먹고 “기특해”라고 말하던, 초코우유의 빨대를 빨던 신 씨의 웃음이었다.

그냥.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내가 아는 신 씨였다.


라이브는 몇 초였다.

정말 몇 초.

하지만 이미 세상에 나갔다.

넘어진 카메라.

묶인 신휘.

피가 묻은 입가.

누군가에게 눌린 남자.

들어오는 경찰.

그리고.

신휘의 목소리.

이건 내 무대가 아니야.

나는 네 것이 아니야.

그 몇 초는 바로 저장됐다.

캡처됐다.

잘렸다.

퍼졌다.

조금 전까지 더 자극적인 장면을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놀랐다고 말했다.

범죄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

선을 넘었다고 말했다.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방송을 기다린 사람들을 질타했다.

방금 전까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대부분 잊은 것처럼.

이 일들로 분명 세상은 시끄러워 지겠지만, 어쨌든 그건 나중 일이었다.

나나 신 씨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날 밤.

폐극장에서 중요한 건 단 하나였다.

남이 만든 가짜 무대는 끝났다.

그리고 다음 무대는.

신 씨가 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