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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폐 아이돌님은 옆집에 살고 계셔 / Chapter 02

CHAPTER 02: 옆집 여자는 최애 굿즈를 평가한다

도윤은 옆집 여자 신 씨에게 라면을 끓여주고, 자신의 SHINHWI 굿즈와 팬심까지 들켜버린다.

옆집 여자는 최애 굿즈를 평가한다

그날 밤, 나는 결국 라면을 끓였다.

라면을 끓이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라면을 내 집이 아닌 옆집에서.

내 냄비가 아닌, 신 씨 집 어딘가에서 겨우 발견한 냄비로.

내 라면이 아닌, 유통기한을 간신히 넘기지 않은 봉지라면으로 끓여야 한다면.

충분히 특별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라면은 인간 문명 중에서도 비교적 강인한 음식이라는 점이었다. 냄비 하나, 물, 스프, 면. 이 네 가지가 있으면 웬만한 재난 현장에서도 어떻게든 먹을 수 있는 형태가 된다.

그러니까 신 씨의 부엌은 이미 재난 현장이었고, 라면은 적절한 선택이었다.

“신 씨.”

“응.”

“앞으로 가스불을 켜실 때는 반드시 옆에 계세요.”

“옆에 있었어.”

나는 새까맣게 탄 프라이팬을 봤다.

“옆에 있으라는 건 몸만 옆에 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켜보셔야죠.”

“어렵네.”

“어렵지 않습니다. 불 켜고 딴짓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딴짓은 했어.”

변명조차 없는 순순한 인정에 살짝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나는 어른이다.

적어도 자신이 태운 프라이팬을 보며 “맞네”라고 말하는 옆집 사람보다는 어른일 것이다.

“뭘요?”

“가사.”

“그럼 불을 끄고 하세요.”

“그러면 오므라이스가 안 되잖아.”

“오늘 보셨듯이, 불만 켜둔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신 씨는 잠깐 생각했다.

“맞네.”

이번에도 순순한 인정이다.

인정이 너무 빠르면 오히려 사람을 지치게 한다는 걸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라면이 끓는 동안, 신 씨는 식탁에 엎드려 있었다. 아까까지 그을음이 묻어 있던 볼은 물티슈로 대충 닦았고, 짧은 흑발은 여전히 헝클어진 채였다. 커다란 검은 티셔츠는 어깨선이 내려가 있었고, 반바지는 티셔츠 아래에 거의 숨어 있었다.

생활력은 전혀 없으면서 용감하게 독립을 감행한, 완벽한 집순이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에 걸렸다.

화장도 하지 않았고,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 위로 부스스한 머리가 내려와 있었다. 그런데도 얼굴선은 묘하게 선명했다. 밤낮이 뒤바뀐 생활이 분명한 피곤한 눈매에는 어딘가 차가운 느낌이 남아 있었고, 인간 문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진심으로 관심 없어 보이는 입매는 감정을 아끼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요즘 내가 정말 이상하다.

활동 중단 이후 SHINHWI 영상만 너무 많이 봤다. 그래서 짧은 흑발에 창백한 피부만 봐도 머릿속에서 이상한 연결을 시작한다.

신 씨는 SHINHWI가 아니다.

SHINHWI님은 라면 물이 끓기 전에 식탁에서 졸지 않는다.

“도윤.”

“네?”

“냄새 좋아.”

“라면 냄새입니다.”

“응.”

“그렇게 감동하실 음식은 아닙니다.”

“배고프면 다 감동이야.”

묘하게 맞는 말이었다.

나는 면을 젓가락으로 풀었다.

“계란 넣습니까?”

“응.”

“신 씨 집에 계란 있습니까?”

“아마.”

나는 냉장고를 열었다.

초코우유. 초코우유. 에너지드링크. 젤리.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스.

그리고 구석에 계란 두 개.

“있긴 있네요.”

“봐.”

“자랑스러워하지 마세요. 냉장고가 거의 편의점 음료 진열대입니다.”

“편하잖아.”

“편한 것과 식생활은 다릅니다.”

“비슷한 거.”

“안 비슷합니다.”

나는 계란을 하나 깼다.

라면 냄비 안에서 노른자가 천천히 익어갔다. 신 씨는 식탁에 턱을 괴고 냄비를 보고 있었다.

눈이 아주 조금 반짝였다.

무대 조명이 아니라 라면 냄비를 보며 눈이 반짝이는 사람.

아무리 봐도 SHINHWI는 아니다.

나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신 씨는 라면을 잘 먹었다.

정말 잘 먹었다.

처음에는 젓가락질도 조금 느렸고, 뜨거운 걸 잘 못 먹는지 후후 불다가 면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런데 몇 젓가락 먹고 나서는 속도가 붙었다. 국물도 마셨다. 계란은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다가 조심스럽게 먹었다.

“맛있어.”

“라면입니다.”

“맛있게 만들었어.”

“제가 만든 요리처럼 말하지 마세요.”

“도윤이 했잖아.”

“끓인 겁니다.”

“요리.”

“라면 회사가 90퍼센트 했습니다.”

“도윤이 10퍼센트.”

“그렇게 지분을 나누지 마세요.”

신 씨는 국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기특하네.”

“제가요?”

“응.”

“라면 끓였다고요?”

“응.”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칭찬의 기준이 너무 낮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쁘지는 않았다.

이것도 위험한 신호다.

식사가 끝난 뒤, 나는 설거지를 하려고 일어났다. 신 씨는 당연하다는 듯 빈 그릇을 내게 밀었다.

아니.

너무 자연스러워서 바로 깨닫지 못했는데, 이건 이상하다.

“잠깐만요.”

“왜.”

“신 씨 집 그릇입니다.”

“응.”

“그러면 신 씨가 씻어야죠.”

그녀는 그릇을 내려다봤다.

마치 방금 처음 보는 물건처럼.

“이걸?”

“네.”

“왜?”

“먹었으니까요.”

“도윤이 끓였잖아.”

“그건 요리 담당이고, 설거지는 별도입니다.”

“인간 문명 귀찮네.”

“오늘 두 번째입니다. 그리고 이건 문명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예의입니다.”

“둘 다 자주 귀찮아.”

“그건 동의합니다.”

나는 결국 그녀에게 설거지 방법을 알려주었다.

인간이란 귀찮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문명과 사회적 예의를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불쌍한 존재다.

세제는 조금만. 스펀지는 여기. 기름기 있는 건 따뜻한 물. 헹굴 때 거품이 남으면 안 된다.

신 씨는 진지하게 들었다.

좋아.

근본적으로 글러 먹거나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저 집안일을 해본 적도 없으면서 독립한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세제를 누르는 순간, 내 눈앞이 하얘졌다.

“잠깐! 잠깐만요!”

이미 늦었다.

세제가 그릇 위에 산처럼 올라갔다.

신 씨는 그것을 보고 말했다.

“깨끗해야 되잖아?”

“너무 많으면 헹구느라 인생이 끝납니다.”

“그릇 하나인데.”

“인생은 가끔 작은 것에서 끝납니다.”

나는 결국 그릇을 다시 가져왔다.

신 씨는 옆에서 스펀지를 들고 있었다.

“어렵네.”

“어렵지 않습니다. 적당히라는 개념이 필요할 뿐입니다.”

“적당히가 제일 어려워.”

이상하게 그 말은 조금 진심처럼 들렸다.

생각해보면 이 사람은 집안일이라는 것을 처음 해보는 사람이다.

회사에서도 ‘적당히’라는 지시는 말한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정확한 기준을 모른다는 암묵적인 합의에 가깝다. 이번에는 기준을 알고 있는 내가 조금 더 명확하게 알려줬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나는 잠깐 신 씨를 보았다.

그녀는 스펀지를 들고 싱크대 앞에 서 있었다. 헐렁한 검은 티셔츠, 짧은 흑발, 맨얼굴, 피곤한 눈.

무대 위의 누군가와는 너무 멀었다.

그런데 방금 한 말은 어딘가 그 무대와도 닿아 있는 것 같았다.

적당히가 어렵다.

어쩌면 SHINHWI도 그랬을까.

붉은 조명 아래에서 검은 레이스를 입고, 지옥을 부르며, 관객을 끌어당겨 끝내 삼켜버리는 그 사람도.

적당히 같은 건 처음부터 모르는 사람이었을까.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만하자.

분리수거도, 설거지도 못할 뿐인 옆집 여자에게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다음 날 퇴근길에 나는 라면을 샀다.

사실 내 집에 라면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제 옆집에서 라면을 끓여준 뒤, 어쩐지 불안해졌다.

신 씨 집의 냉장고에는 식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초코우유. 젤리. 에너지드링크. 미지근한 캔음료. 정체불명의 소스.

사람은 그런 것으로 오래 살 수 없다.

물론 신 씨는 아직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생존이지 생활이 아니었다.

나는 편의점에서 봉지라면 묶음 하나와 즉석밥 두 개, 계란 여섯 개짜리 한 팩을 샀다. 계산대 앞에 서고 나서야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왜 내가 사지.”

점원은 아무 관심도 없었다.

당연하다.

편의점 점원은 손님이 왜 라면과 계란을 사는지 묻지 않는다. 그게 현대 문명의 좋은 점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더 큰 문제를 발견했다.

내 집 앞에 신 씨가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내 현관문 옆 벽에 기대어 쪼그려 앉아 있었다. 커다란 흰 티셔츠에 검은 반바지, 슬리퍼 차림이었다. 손에는 초코우유 팩이 들려 있었고, 빨대는 이미 꽂혀 있었다.

나는 멈췄다.

“신 씨.”

“응.”

“왜 여기 계십니까?”

“기다렸어.”

“왜요?”

“라면.”

나는 편의점 봉투를 내려다봤다.

라면이 있었다.

불길했다.

“혹시 제 생각이 들린 겁니까?”

“냄새?”

“아직 안 끓였는데요.”

“그럼 감.”

“감으로 남의 집 앞에서 기다리지 마세요.”

신 씨는 초코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내 집 탄 냄새 나.”

“아직도요?”

“응.”

“환기는요?”

“창문 열면 추워.”

“그럼 탄 냄새랑 같이 사시려고요?”

“익숙해지면 돼.”

“익숙해지면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쨌든 나는 좋은 이웃이고 싶었다.

어제 그 엉망인 부엌을 본 이상, 라면 하나 때문에 찾아온 사람을 문전박대하기도 힘들었다.

나는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문을 열자마자 내 방 안쪽이 보였다.

포스터.

앨범장.

굿즈 진열장.

책장 위 아크릴 스탠드.

책상 옆에 세워둔 SHINHWI 콘서트 슬로건.

그리고 벽 중앙에 붙어 있는 Velvet Inferno 한정판 포스터.

신 씨가 고개를 들어 안을 보았다.

나는 급히 몸으로 가리려 했다.

너무 늦었다.

“많네.”

그녀가 말했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팬이라서요.”

“SHINHWI?”

“네.”

“많이?”

“그 질문 어제도 하셨습니다.”

“오늘도 많아 보여.”

“네. 많습니다.”

나는 포기했다.

이 정도는 괜찮다.

포스터와 앨범, 공식 굿즈 정도는 팬이라면 가질 수 있다.

물론 내 방의 밀도는 조금 높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높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사회적으로 사망할 정도는 아니다.

아직은.

나는 신 씨를 거실 쪽으로 안내했다.

“앉아 계세요. 라면 끓이겠습니다.”

“여기서?”

“제 집이니까요.”

“급식소?”

“아닙니다.”

“라면 나오잖아.”

“나온다고 다 급식소는 아닙니다.”

“비슷한 거.”

“안 비슷합니다.”

신 씨는 식탁 의자에 앉지 않고 방 안쪽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나는 부엌 쪽에서 바로 말했다.

“만지시면 안 됩니다.”

“아직 안 만졌어.”

“예방 차원입니다.”

“도윤 잔소리.”

“남의 방 굿즈는 함부로 만지면 안 됩니다.”

“굿즈.”

그녀는 그 단어를 천천히 따라 말했다.

“응.”

그리고 가까운 책장 앞에 섰다.

거기에는 SHINHWI 앨범들이 연도순으로 꽂혀 있었다.

disism. 7th Heaven. The Twelvefold Inferno. Blue Halo. DOLLHOUSE THEATRE. Velvet Inferno.

심지어 초창기 곡을 담아 소량 제작한 팬 이벤트용 특전 EP까지.

물론 팬덤에서 정리한 앨범 세계관과 곡 해석을 인쇄해 끼워둔 바인더도 있었다.

그건 조금 과하다.

인정한다.

하지만 SHINHWI님은 철학적인 앨범에 해석 불능의 단답형 후기를 남기는 분이다.

누가 봐도 근미래 디스토피아 세계의 노래를 하면서 서기 2020년이라는, 이미 한참 지나간 날짜를 쓰는 분이다.

해석 없이는 그 깊은 세계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신 씨는 고개를 기울였다.

“다 있어?”

“일단 구할 수 있는 건요.”

“초기 것도 있네?”

“그 특전 EP를 알고 계신 겁니까? 이벤트 한정판이라 정말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

“네. 공개상으로는 2022년 초기에 나온 앨범으로 알려져 있는데, 팬덤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오래된 정서가 있다는 말이 많거든요. 붉은 조명이나 지옥 콘셉트가 본격화되기 전인데도, 이미 SHINHWI 안에 있던 어둠이 보이는 앨범이라서요.”

신 씨는 앨범 케이스를 가만히 봤다.

“어둠.”

“네. 아직 사람을 유혹하는 SHINHWI라기보다, 자기 안으로 가라앉는 신휘…… 아니, SHINHWI라고 해야겠죠. 아무튼 그런 느낌입니다.”

“신휘.”

그녀가 낮게 따라 말했다.

나는 라면 봉지를 뜯다 말고 멈췄다.

그 발음이 이상하게 자연스러웠다.

아니, 당연히 자연스러울 수 있다.

한글 두 글자다.

누구나 말할 수 있다.

“그런 건 어떻게 알아?”

신 씨가 물었다.

“들으면요.”

“들으면?”

“네. 팬이면 압니다.”

“팬은 다 알아?”

나는 그 말에 잠깐 웃었다.

“아뇨. 팬도 다는 모릅니다. 다 안다고 생각하는 팬이 위험하죠.”

그녀가 나를 봤다.

“그래?”

“네. 저는 SHINHWI님을 좋아하지만, 그분을 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아는 건 그분이 보여준 무대와 음악이죠. 그 사람 자체를 안다고 말하면…… 그건 좀 무섭잖아요.”

신 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앨범장 앞에 서서 케이스들을 보고 있었다.

나는 냄비에 물을 받았다.

“요즘 스캔들에서도 그게 제일 싫습니다.”

“뭐가?”

“사람들이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거요.”

나는 가스불을 켰다.

“SHINHWI가 그런 이미지를 했으니까 실제로도 그럴 거다. 무대에서 그렇게 입었으니까 사생활도 그럴 거다. 성인 지향 콘셉트를 했으니까 그런 영상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식으로.”

말하다 보니 또 열이 올랐다.

어제도 그랬다.

나는 왜 처음 보는 이웃 앞에서 계속 SHINHWI 변론을 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신 씨는 이번에도 막지 않았다.

오히려 책장 앞에 쪼그려 앉아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예를 들어 disism의 AD 2020 뮤직비디오 있잖아요.”

“응.”

“아시나요?”

“비슷하게.”

“그 비슷하게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영상도 당시에는 꽤 충격적이었어요. 주문 제작되는 인간과 상품화된 사랑을 다루는 콘셉트 안에서, SHINHWI님이 제조되는 신부로 등장하니까요.”

나는 잠깐 말을 골랐다.

“조금 노골적으로 말하면, 장면만 떼어놓았을 때는 거의 성인용 신부 카탈로그처럼 보입니다. 제조 탱크 안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SHINHWI님이 놓여 있고, 얼굴과 체형은 물론 성적 취향이나 침실에서의 반응까지 구매자가 고르는 옵션으로 묘사되니까요.”

나는 스프 봉지를 뜯었다.

알게 된 지 하루밖에 안 된 젊은 이웃 앞에서 이런 말까지 해도 되는 걸까 싶어 잠시 눈치를 봤지만, 신 씨는 별다른 표정 없이 듣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라면만 생각하고 있어서 제대로 듣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야한 장면이죠.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노골성 자체가 작품의 비판이었어요. 사람의 몸과 사랑과 욕망까지 상품 사양으로 바꾸는 세계를 보여준 거니까요. 그냥 벗겨놓고 소비하라는 영상이 아니었다고요.”

“야한 장면.”

“그 단어에만 반응하지 마세요.”

신 씨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다행이다.

제대로 듣지 않은 게 아니라, 그냥 내 반응을 보고 놀리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이번 유포물은 완전히 달라요. 맥락도 없고, 주체도 없고, 통제도 없고. 그냥 SHINHWI의 이미지를 가장 더러운 쪽으로 끌어내려 사람들이 씹게 만든 겁니다. 그걸 보고 ‘원래 그런 이미지였잖아’라고 말하는 건…….”

나는 말을 멈췄다.

너무 격해졌다.

이웃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다.

더구나 나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젊은 여성에게는.

하지만 신 씨는 조용히 말했다.

“무대에서 불 썼다고.”

“네?”

“집에 불 질러도 되는 건 아니잖아.”

나는 손을 멈췄다.

냄비의 물이 끓기 시작했다.

신 씨는 앨범장을 보며 말했다.

“이미지를 판 거랑, 남이 만든 가짜를 뒤집어쓰는 건 다르잖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어제부터.

아니, 스캔들이 터진 날부터 계속 하고 싶었던 말.

그런데 그 말이 신 씨의 입에서 너무 쉽게 나왔다.

너무 정확하게.

나는 그녀를 돌아봤다.

신 씨는 여전히 책장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손에는 초코우유가 들려 있었고, 머리는 대충 헝클어져 있었고, 흰 티셔츠는 무릎 위로 조금 구겨져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만큼은.

정말 아주 잠깐.

그녀가 화면 속 SHINHWI처럼 보였다.

나는 급히 면을 냄비에 넣었다.

착각이다.

라면 타이밍이 중요하다.

정신이 흔들릴 때일수록 라면은 현실을 붙잡게 해준다.

“신 씨.”

“응.”

“혹시 SHINHWI 좋아하세요?”

그녀는 잠깐 생각했다.

“비슷한 거.”

“대체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건 뭡니까?”

“싫진 않아.”

“그럼 좋아하는 거 아닙니까?”

“비슷한 거.”

나는 포기했다.


라면이 익는 동안 신 씨는 내 방 구경을 계속했다.

다행히 그녀는 정말로 함부로 만지지는 않았다. 대신 하나하나 오래 보았다.

DOLLHOUSE THEATRE 포스터 앞에서는 조금 오래 멈췄다.

붉은 실에 묶인 인형극장.

뉴스 화면과 전쟁 이미지가 뒤섞인 무대.

SHINHWI가 마리오넷처럼 매달려 있으면서도, 정작 실 끝을 쥔 사람처럼 보이는 구도.

“이건 좋아하십니까?”

내가 물었다.

“빨갛네.”

“감상이 그것뿐입니까?”

“실 많아.”

“네. 인형극장 콘셉트니까요. 저는 이 앨범이 SHINHWI님을 성인 다크 아이돌 이미지로 완전히 각인시킨 계기라고 봅니다. 단순히 야한 게 아니라, 관객도 정치 쇼도 전쟁도 전부 인형극장 안에 넣어버리는 앨범이죠. 그래서 무섭고요.”

“도윤은 설명 길어.”

“팬이라서요.”

“재밌어.”

“정말요?”

“응.”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다.

하지만 듣고는 있었다.

그게 이상하게 기뻤다.

사람들은 대개 저 포스터를 보면 찢어진 검은 란제리 차림의 SHINHWI부터 이야기했다. 붉은 실도, 뉴스 화면도, 전쟁 이미지도 그다음이었다.

신 씨는 적어도 눈에 보이는 자극 너머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내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나는 라면을 그릇에 옮겼다.

“먹으면서 보세요.”

“응.”

신 씨는 식탁에 앉았다.

이번에도 초코우유를 옆에 두고 라면을 먹으려 했다.

나는 바로 말했다.

“라면 먹을 때 초코우유는 내려놓으세요.”

“왜.”

“조합이 이상합니다.”

“맛있어.”

“신 씨의 식생활 미학은 믿을 수 없습니다.”

“상처네.”

“몸에 좋은 방향의 상처입니다.”

“치사해.”

“영양입니다.”

신 씨는 불만스럽게 초코우유를 내려놓았다.

그것만으로도 큰 발전이었다.

라면을 한 젓가락 먹은 뒤, 그녀는 다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건?”

그녀가 식탁 옆에 놓인 작은 아크릴 스탠드를 가리켰다.

Velvet Inferno 활동 당시 SHINHWI의 SD 악마 버전이었다. 작은 뿔과 꼬리가 달린, 귀엽지만 눈매는 차가운 캐릭터.

“공식 굿즈입니다.”

“나네.”

“네?”

“아니. 닮았어.”

나는 그녀를 봤다.

“신 씨가요?”

“왜.”

“아뇨. 같은 짧은 흑발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응.”

“하지만 이쪽은 지옥 서큐버스 아이돌이고, 신 씨는 라면을 기다리는 옆집 사람입니다.”

“차이 크네.”

“매우 큽니다.”

“상처네.”

“이번엔 맞는 말입니다.”

“더 상처.”

신 씨는 라면을 먹으며 아크릴 스탠드를 봤다.

“귀엽네.”

“그렇죠?”

“응.”

“하지만 SHINHWI님은 단순히 귀여운 게 아닙니다. Pretty Little Disaster 같은 곡이 특히 그런데, 귀엽고 위험하고 섹시한 게 동시에 있어요. 예쁘게 웃는데, 그 웃음이 독처럼 느껴지는—”

나는 말을 하다 멈췄다.

또 시작했다.

팬심 자동 재생.

신 씨는 젓가락을 든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계속해.”

“아니, 괜찮습니다.”

“왜.”

“제가 너무 많이 말합니다.”

“재밌다니까.”

“어느 부분이요?”

“도윤이 열내는 거.”

“그건 제 입장에서는 조금 복잡합니다.”

신 씨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짧았지만, 묘하게 사람을 흔들었다.

나는 물을 마셨다.

침착하자.

상대는 옆집 여자다.

초코우유와 라면을 동시에 먹으려는 사람이다.


식사가 끝나갈 때쯤, 신 씨는 책장 아래쪽에 꽂혀 있던 엽서 세트를 발견했다.

나는 순간 몸을 굳혔다.

GRIMM ERROR 선공개 콘셉트 엽서 세트.

활동 중단 직전에 공개된 미발표 앨범의 콘셉트 이미지들.

그림 동화 고딕 호러.

검은 숲. 부서진 성. 붉은 망토. 개구리 왕자. 유리구두. 찢어진 동화책.

팬덤에서는 거의 저주받은 떡밥 취급을 받고 있었다.

앨범은 나오지 못했다.

스캔들이 터졌고, 활동은 멈췄고, GRIMM ERROR는 이름만 남았다.

신 씨는 그 엽서들 앞에서 멈췄다.

“이건?”

“GRIMM ERROR 콘셉트 엽서입니다.”

“그림?”

“네. 정확히는 GRIMM ERROR. 올해 발매될 예정으로 준비 중이던 앨범이었는데…… 이번 활동 중단 때문에 미발표가 됐죠. 팬덤에서는 거의 전설처럼 됐습니다. 그림 동화 고딕 호러 콘셉트였고요. 개구리 왕자, 빨간 망토, 신데렐라 같은 이미지들이 선공개됐는데, 정작 앨범은 못 나왔습니다.”

신 씨는 엽서 중 하나를 바라봤다.

개구리 왕자 콘셉트 이미지였다.

어두운 연못가, 검은 드레스, 창백한 얼굴, 손끝에 놓인 작은 개구리. 고딕 동화풍의 차갑고 아름다운 이미지.

나는 그 엽서를 볼 때마다 아쉬움이 컸다.

GRIMM ERROR가 나왔다면 어땠을까.

SHINHWI가 동화를 어떻게 망가뜨렸을까.

그 검은 숲과 부서진 성 안에서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팬으로서 그건 거의 빼앗긴 앨범이었다.

그런데 신 씨는 한참 엽서를 보더니 말했다.

“개구리 불쌍해.”

나는 멈췄다.

“네?”

“개구리.”

“지금 그게 문제입니까?”

“저렇게 들고 있잖아.”

“그건 콘셉트입니다.”

“그래도 불쌍해.”

나는 엽서를 다시 보았다.

확실히 개구리가 조금 얌전히 들려 있기는 했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팬덤은 이걸 미발표 앨범의 상징으로 봅니다.”

“응.”

“SHINHWI가 다음 세계로 넘어가기 직전에 멈춰버린 흔적이라고요.”

“개구리도 멈췄네.”

“개구리에서 벗어나세요.”

“제일 불쌍한데.”

나는 머리를 감쌌다.

이 사람은 정말 이상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웃겼다.

그리고 이상하게, 무대 밖의 SHINHWI라면 정말 이런 말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또 시작이다.

내 뇌는 요즘 너무 위험하다.

“신 씨.”

“응.”

“혹시 GRIMM ERROR까지 아십니까?”

“비슷한 거.”

“그 ‘비슷한 거’가 계속 사람을 불안하게 합니다.”

“왜.”

“팬 아니면 모를 법한 것들에 너무 자연스럽게 반응하시니까요.”

“도윤이 많이 설명하잖아.”

“방금 설명하기 전에 개구리를 불쌍해하셨습니다.”

“개구리는 보면 알잖아.”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어렵다.

개구리는 보면 안다.

나는 졌다.


라면을 다 먹은 뒤, 신 씨는 내 방 한쪽에 쌓인 바인더들을 보았다.

“이건?”

“팬 자료입니다.”

“자료?”

“무대 해석, 앨범 세계관 정리, 인터뷰 모음, 허위 스캔들 반박 자료…… 그런 겁니다.”

“반박.”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바인더 하나를 꺼냈다.

최근 며칠 동안 정리한 자료였다.

유포된 사진과 영상의 조작 의심 지점. 공식 입장문. 팬덤에서 발견한 프레임 불일치. 비교 이미지. 신고 링크. 법적 대응 공지.

신 씨는 그것을 말없이 보았다.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면을 먹던 손이 멈췄다.

나는 괜히 불안해졌다.

“보기 불편하시면 안 보셔도 됩니다.”

“왜 정리해?”

“화가 나서요.”

“도윤 일이 아닌데.”

“팬 일이죠.”

“팬이면?”

나는 대답을 고르다가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더럽혀지는 걸 보고만 있긴 싫으니까요.”

신 씨는 나를 봤다.

“더럽혀져?”

나는 잠깐 망설였다.

단어가 너무 강했나.

하지만 바꾸고 싶지 않았다.

“네.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SHINHWI님이 만든 무대는 과감하지만 더러운 게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번 유포물을 보면서 그 둘을 일부러 섞고 있습니다. 그게 싫었습니다.”

신 씨는 다시 바인더를 보았다.

“귀찮았겠다.”

“네. 귀찮았습니다.”

“근데 했어?”

“네.”

“왜?”

“좋아하니까요.”

말하고 나서 조금 민망해졌다.

너무 정직했다.

신 씨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작게 말했다.

“무겁네.”

“어제도 그러셨습니다.”

“오늘도 무거워.”

“죄송합니다.”

“아니.”

그녀는 바인더를 덮었다.

“나쁘진 않아.”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나쁘진 않아.

그건 칭찬일까.

신 씨 기준에서는 아마 꽤 괜찮은 평가일지도 모른다.

나는 바인더를 다시 책장에 꽂았다.

“그래도 신 씨.”

“응.”

“제 집에 이런 것들이 있다고 동네에 이야기하고 다니시면 안 됩니다.”

“왜.”

“개인적인 취미니까요. 그리고 민감한 내용도 있고.”

“안 해.”

“의외로 바로 대답하시네요.”

“외부 공개는 안 돼.”

나는 그녀를 보았다.

“그건 또 아십니까?”

“응.”

“기본 상식이 살아 있어서 다행입니다.”

“상식 조금 있어.”

“분리수거 쪽에도 배분해주세요.”

“그건 어려워.”

“왜요?”

“규칙 많잖아.”

“외부 공개도 규칙입니다.”

“그건 알겠어.”

“왜 그건 알고 분리수거는 모르십니까?”

신 씨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건 들키면 도윤 죽잖아.”

“분리수거도 관리인 아저씨에게 혼납니다.”

“그건 안 죽어.”

반박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의 논리는 이상하지만 가끔 묘하게 현실적이다.


신 씨가 돌아간 건 밤 10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정확히는 내가 돌려보냈다.

그녀는 내 방 바닥에 앉아 앨범장을 계속 보려 했고, 나는 다음 날 출근을 해야 했다.

“신 씨, 이제 가셔야 합니다.”

“왜.”

“저 출근합니다.”

“내일?”

“네.”

“지금은 밤인데.”

“직장인은 밤부터 내일을 걱정합니다.”

“불쌍하네.”

“맞습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는 다 먹은 초코우유 팩이 있었다.

나는 바로 말했다.

“그건 일반쓰레기가 아닙니다.”

“알아.”

“정말요?”

“씻으면 일반쓰레기 아냐.”

“네. 씻어서 종이팩으로 분리하세요.”

“귀찮네.”

“벌써 또 문명을 포기하지 마세요.”

신 씨는 입술을 조금 내밀었다.

“도윤 잔소리.”

“오늘만 세 번째입니다.”

“기억력 좋네.”

“신 씨 때문에 좋아지고 있습니다.”

“기특해.”

“그 말, 너무 쉽게 쓰시는 것 아닙니까?”

“좋잖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좋은가?

모르겠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현관 앞에서 신 씨는 신발을 신었다. 슬리퍼였다. 끌고 온 그대로 끌고 나가는 소리가 복도에 작게 울렸다.

문을 열기 전, 그녀가 돌아봤다.

“도윤.”

“네.”

“SHINHWI 좋아하네.”

나는 조금 당황했다.

“네. 좋아합니다.”

“많이.”

“네.”

“근데.”

그녀는 잠깐 말을 멈췄다.

“다 안다고는 안 하네.”

나는 그녀를 보았다.

“네.”

“왜?”

“모르니까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전부를 아는 건 아니잖아요. 무대는 볼 수 있지만, 무대 밖까지 아는 건 아니니까요.”

신 씨는 나를 가만히 보았다.

초코우유 빨대 때문에 살짝 눌린 입술.

잠이 덜 깬 듯한 눈.

그런데 이상하게 선명한 시선.

“그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괜찮네.”

“뭐가요?”

“도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신 씨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하기 귀찮은 사람답게.

그녀는 문밖으로 나갔다.

“잘 자.”

“네. 신 씨도요.”

“응.”

문이 닫혔다.

나는 한참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방 안에는 아직 라면 냄새가 남아 있었다.

책장에는 SHINHWI 앨범들이 그대로 꽂혀 있었다.

포스터 속 SHINHWI는 여전히 붉은 조명 아래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까지 그 포스터 아래에는 신 씨가 앉아 있었다.

생활력 제로의 옆집 여자.

분리수거를 모르고, 라면을 좋아하고, 개구리를 불쌍해하고, 내 팬심을 무겁다고 말한 사람.

나는 포스터를 보았다.

SHINHWI의 눈빛은 차가웠다.

신 씨의 눈빛도 가끔 그랬다.

“아니야.”

나는 혼잣말했다.

“그럴 리가 없지.”

그런데 이상하게 설득력이 약했다.

나는 남은 것을 정리하려고 싱크대로 갔다.

재활용품은 씻어서 말린 뒤 분리수거해야 한다.

신 씨의 말대로 인간 문명은 귀찮다.

하지만 해야 한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택배 앱 알림이었다.

주문하신 상품이 내일 배송 예정입니다.

나는 무심코 알림을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SHINHWI Velvet Inferno Limited Body Pillow Full Set 배송 예정일: 내일

아.

나는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동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포스터. 앨범. 아크릴 스탠드. 엽서. 바인더.

오늘 신 씨는 이 모든 것을 봤다.

오늘 온 게 아니라는 사실만은 다행이었다.

덕분에 제일 위험한 물건은 아직 들키지 않았다.

아직.

나는 휴대폰을 꼭 쥐었다.

“……내일은 절대 집에 들이면 안 된다.”

혼잣말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대체로 그런 혼잣말을 비웃기 위해 존재한다.

나는 그 사실을, 다음 날 아주 뼈저리게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