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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폐 아이돌님은 옆집에 살고 계셔 / 2권 / Chapter 03

CHAPTER 03: 옆집 여자는 덧니가 예쁘다

연습실에서 신휘를 기다리던 도윤은 그녀의 낯선 단서들을 마주한다. 서류 속 숫자와 익숙한 버릇들이 겹치며, 머릿속에 말도 안 되는 의심이 떠오른다.

옆집 여자는 덧니가 예쁘다

도망가지 마.

신휘는 그렇게 말하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나는 연습실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도망이라니.

나는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여기까지 온 것부터가 도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말 오전에 신휘를 깨우고, 편의점에서 초코우유 큰 팩을 사고, NOVA LINE MUSIC 지하 연습실까지 따라오고, SHINHWI의 밴드 멤버들을 만나고, MY STAGE 리허설을 보고, 급식소 기사님이라는 이상한 직함까지 얻었다.

이미 많이 늦었다.

도망가려면 분리수거장에서 도망갔어야 한다.

그날 옆집 여자가 쓰레기봉투 앞에서 “다 쓰레기잖아”라고 말했을 때.

그때 도망갔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도망가지 않았다.

대신 라면을 끓였다.

인생은 작은 선택의 연속이라더니, 정말 무서운 말이었다.

라면 한 번 끓였을 뿐인데 여기까지 왔다.

나는 연습실 소파에 앉아 회의실 문을 보았다.

문 너머로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한유경 매니저의 목소리. 민태준의 차분한 설명. 서하린의 밝은 대답. 강태오의 낮은 목소리.

그리고 중간중간 끼어드는 신휘의 짧은 말.

“귀찮아.”

“싫어.”

“왜.”

“그건 좀 멋없어.”

“초코우유.”

마지막 건 분명히 회의 안건이 아닐 것이다.

아니, 신휘라면 회의 안건일 수도 있다.

복귀 라이브 세트리스트. 현장 동선. 온라인 송출 딜레이. 비상 대응 프로토콜. 초코우유.

말이 안 된다.

그런데 말이 되는 게 더 무섭다.

회의는 40분이라고 했다.

민태준의 예상이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는 메모장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었고, 감사 인사도 보고서처럼 하는 사람이었고, 신휘의 “치사해” 발생 빈도까지 평균 내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최소 40분이라고 말하면, 적어도 40분쯤 뒤에는 끝날 것 같았다.

나는 휴대폰을 봤다.

42분.

끝나지 않았다.

민태준 씨.

회사도 아닌데 회의 시간을 그렇게 정확하게 재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속으로 항의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고쳤다.

나는 진짜 회사원이다.

회의가 제시간에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잘 안다.

특히 회의 안건에 ‘신휘’라는 변수가 들어가면, 예상 시간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나는 연습실을 둘러보았다.

드럼. 베이스 앰프. 기타 케이스. 마이크 스탠드. 케이블.

그리고 마이크 스탠드 옆 작은 테이블에 놓인 초코우유 팩.

신휘의 물건답게 반쯤 비어 있었다.

다 마시지도 않았다. 버리지도 않았다. 정리하지도 않았다.

그냥 거기 있었다.

마치 “나는 언젠가 다시 필요해진다”는 듯한 태도로.

초코우유에 태도라는 게 있을 리 없지만, 신휘의 손을 한 번 거친 물건은 이상하게 그런 느낌이 생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왜 초코우유를 이렇게 진지하게 보고 있지.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초코우유 관찰이 아니다.

하지만 이 공간에는 이상하게 관찰하고 싶어지는 것들이 많았다.

하린의 드럼 옆에는 순정만화 단행본이 쌓여 있고 그중 한 권이 펼쳐져 놓여 있었다.

제목은 못 봤다.

하지만 표지에는 눈이 크고 머리카락이 반짝이는 여주인공과, 검을 든 남자가 있었다.

북마크가 꽂혀 있었다.

아마 하린 씨는 정말로 순정만화 속에서 세상을 해석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를 기사님이라고 부른다.

나는 일반인인데.

베이스 케이스 위에는 작은 라벨이 붙어 있었다.

케이블 / 예비 스트랩 / 건전지 / 신휘 선배님용 목캔디

목캔디까지 관리하는구나.

민태준 씨답다.

그리고 무섭다.

라벨의 배경에는 모두 신휘의 굿즈 스티커가 붙어 있었으니까.

밴드 멤버가 굿즈를 갖고 있는 것은 흔한 일일 것이다.

아마.

태오의 기타 케이스는 낡았지만 깨끗했다.

아까 들었던 기타 소리가 떠올랐다.

신휘가 갈 곳을 먼저 알고 기다리던 소리.

팬으로서 강태오에 대한 정보는 많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궁금한 건 그런 정보가 아니었다.

저 사람은 신휘를 얼마나 오래 알고 있는 걸까.

그건 팬카페나 검색으로 나오는 정보가 아니다.

나는 휴대폰을 열었다.

박 대리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박정민 대리: 살아 있습니까?

나는 답장했다.

서도윤: 회의가 길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답이 왔다.

박정민 대리: 회사도 아닌데 회의에 갇히다니. 주말의 의미가 없네요.

서도윤: 저는 회의실 밖입니다.

박정민 대리: 그럼 인질이 아니라 대기 인원이네요.

서도윤: 표현이 조금 낫군요.

박정민 대리: 그 분은요?

나는 회의실 문 쪽을 보았다.

문 너머에서 신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마지막에 불 질러.”

한유경 매니저의 목소리가 바로 높아졌다.

“불은 안 됩니다. 안전 문제가 큽니다.”

“조명으로.”

“그럼 조명이라고 말씀해주세요.”

“비슷한 거.”

“전혀 다릅니다.”

나는 답장했다.

서도윤: 회의 중입니다. 불을 지르자는 의견을 내고 있습니다.

잠시 뒤.

박정민 대리: 그 분답네요.

나는 작게 웃었다.

박 대리는 이제 신휘를 꽤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직접 만난 적도 없는데.

아니, 어쩌면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더 안전하게 이해하는지도 모른다.

만나면 사람은 보통 무너진다.

나처럼.

나는 다시 문 쪽을 보았다.

안쪽 목소리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온라인 송출 딜레이는 최소 7초 넣겠습니다.”

한유경 매니저였다.

“현장 카메라팀과 온라인 송출팀은 분리하고, 비상 상황 발생 시 바로 블랙아웃 가능한 구조로 갑니다. 지난번처럼 현장 판단이 늦어지면 안 됩니다.”

“블랙아웃 싫어.”

신휘가 말했다.

“화면 끊기면 답답해.”

“안 끊기는 게 목표입니다.”

“그럼 왜 넣어.”

“비상상황 때문입니다.”

“비상상황 안 만들면 되잖아.”

잠깐.

정적.

한유경 매니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신휘 씨.”

그 목소리는 방금 전까지의 실무자 목소리와 달랐다.

조금 더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조금 더 피곤했다.

“세상은 그렇게 협조적이지 않습니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껐다.

방금 말은 문 너머에서 들어도 무겁게 들렸다.

회의실 안도 잠깐 조용해졌다.

신휘가 대답했다.

“알아.”

짧았다.

정말 짧았다.

하지만 그 짧은 말이 이상하게 선명했다.

알아.

신휘는 안다.

세상이 협조적이지 않다는 걸.

누군가 자기 이름을 훔치려 했고. 누군가 자기 무대를 오염시키려 했고. 누군가 그 장면을 보고 싶어 했다는 걸.

그런데도 그녀는 불을 지르자고 말한다.

조명을 더 세게 넣자고 말한다.

초코우유를 찾는다.

무너진 건 아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것도 아닐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상처를 오래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

상처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걸 노래와 조명과 이상한 농담으로 바꿔버리는 사람.

신휘는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문 너머에서 다시 말소리가 이어졌다.

“MY STAGE 마지막 후렴에서는 백라이트를 완전히 열고 갑니다.”

한유경 매니저의 목소리.

“다만 오프닝 룸 톤 연출은 송출팀과 다시 맞춰야 합니다. 방구석 라이브의 이미지를 가져가되, 폐쇄 공간처럼 보이면 안 됩니다.”

“작은 방.”

신휘가 말했다.

“네. 그 이미지요.”

“처음엔 작은 방이었어.”

신휘가 낮게 흥얼거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 노래의 첫 소절은 이제 내 방과 너무 강하게 묶여 있었다.

내 책장. 내 휴대폰. 내 흔들리던 손. 내 방 한쪽에 있던 포스터. 그리고 아직 상자에 갇혀 있던, 아니 이제는 풀려난 다키마쿠라.

아니.

여기서 다키마쿠라를 떠올리면 안 된다.

MY STAGE의 장엄함이 무너진다.

내 사회적 생명도 같이 무너진다.

“그럼 오프닝은 방에서 무대로 확장되는 느낌으로 가겠습니다.”

태준의 목소리였다.

“방은 좁게, 후렴은 넓게. 1차 송출 콘티에 반영하겠습니다.”

“좋아.”

신휘가 말했다.

“방은 작게.”

“네.”

“무대는 크게.”

“네.”

“불은?”

“조명입니다.”

한유경 매니저와 태오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신휘가 투덜거렸다.

“치사해.”

이상하게 안심됐다.

무거운 이야기 끝에 나온 치사해.

그게 신휘답다고 생각했다.

그때 회의실 문이 열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가장 먼저 나온 건 하린이었다.

“아, 끝났다!”

하린은 두 팔을 위로 들었다.

“회의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어요. 드럼 세 시간 치는 것보다 힘들어요.”

그 뒤로 민태준이 나왔다.

손에는 당연히 수첩이 있었다.

“회의 시간 총 68분 12초. 예상보다 28분 12초 초과했습니다.”

“그걸 쟀어요?”

내가 묻자, 태준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휘 선배님은 세계를 만드시는 분입니다. 물론 회의도 필요한 요소지만, 지나치게 길어지면 세계 창조에 방해가 됩니다. 정확한 예측이 필요합니다.”

나는 태준이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무섭도록 실무적이네요.”

그리고 회사원보다 더 사무적인 행동의 원인이 신휘 씨라는 것 역시 생각하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칭찬이 아니었다.

아니, 이제 모르겠다.

태준 씨에게는 칭찬일지도 모른다.

강태오가 뒤이어 나왔다.

그는 연습실에 들어와 기타 케이스를 어깨에 멘 채 나를 보았다.

“오래 걸렸지요?”

“네.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 보여도 괜찮다고 하는 타입이네요.”

“직장인이라서요.”

태오는 낮게 웃었다.

괜찮다는 것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다.

신 씨의 이웃인 것에 앞서 나는 SHINHWI의 팬이다.

팬이라면 돈을 내고서라도 보고 싶은, 돈을 내고서도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주말 하루가 사라져 버렸지만, 팬의 입장에서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에게 이 상황을 만든 장본인인 신휘가 나왔다.

손에는 초코우유 팩이 들려 있었다.

언제 다시 챙겼지.

혹시 신휘 씨가 참가하는 회의에는 초코우유가 구비되는 걸까.

충분히 그럴 것 같다.

신휘는 나오자마자 나를 봤다.

“도윤.”

“네.”

“급식소.”

회의가 끝나자마자 첫마디가 급식소였다.

나는 그녀를 보았다.

신휘는 진지했다.

정말로 진지했다.

“복귀 라이브 관련 중요한 회의였죠?”

“응.”

“방금 MY STAGE 송출 동선과 안전 프로토콜을 논의하셨죠?”

“응.”

“그런데 첫마디가 급식소입니까?”

“응.”

“일관성은 있네요.”

“도윤 집.”

“그 흐름도 일관되네요.”

하린이 옆에서 웃었다.

“언니, 진짜 도윤 씨 집을 식당처럼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신휘는 잠시 생각했다.

“식당은 아니야.”

“그럼요?”

“급식소.”

“더 나빠요.”

“왜.”

“식당은 돈이라도 내잖아요.”

신휘가 나를 봤다.

“돈 내?”

“청구한 적은 없습니다.”

“봐.”

“제가 졌네요.”

태준이 수첩을 보며 말했다.

“서도윤 씨 집 방문 빈도가 늘 경우, 공식 급식소 지정 검토 필요.”

나는 태준을 봤다.

“검토하지 마세요.”

“관리 차원입니다.”

“급식소로 취급 받더라도 관리 주체는 저입니다.”

게다가 내 집을 급식소 취급하는 것은 신 씨뿐이다.

멀쩡한 사람이라면 옆집을 급식소로 취급하지도 않을 테고, 이왕이면 맛있는 요리가 나오는 집으로 찾아가겠지.

관리 주체를 주장하는 시점에서 이미 진짜 급식소 주인이나 기사님이 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지만.

한유경 매니저가 마지막으로 회의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파일을 들고 있었다.

피곤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표정은 정확했다.

“서도윤 씨. 잠깐 괜찮으실까요?”

나는 바로 자세를 고쳤다.

“네.”

신휘가 옆에서 말했다.

“급식소는?”

“신휘 씨는 잠깐 기다리세요.”

한유경 매니저가 딱 잘랐다.

신휘는 얼굴을 찌푸렸다.

“치사해.”

태오가 바로 말했다.

“오늘 여섯 번째다.”

“세지 마.”

“많이 하잖아.”

“태오도 치사해.”

“나는 정확히 세고 있는 거야.”

“정확한 배신.”

“그건 새로운데.”

태준이 펜을 들었다.

신휘가 말했다.

“쓰지 마.”

태준은 잠깐 멈췄다.

“기록 가치가 높습니다.”

“배신.”

“기록입니다.”

신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배신이 기록의 옷을 입었네.”

태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적었다.

“오늘 세 번째 배신 변주입니다.”

“쓰지 말라니까.”

“이미 썼습니다.”

하린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다시 생각했다.

이곳 사람들은 정말 신휘에게 적응되어 있다.

하린은 웃음으로 받아내고. 태준은 기록으로 받아내고. 태오는 잔소리로 받아낸다. 한유경 매니저는 서류로 막는다.

그리고 나는.

라면으로 막는다.

이상하다.

내 역할만 너무 탄수화물 중심이다.

한유경 매니저가 내게 파일을 내밀었다.

“서도윤 씨도 앞으로 몇 번 연습실에 오시게 될 것 같아서요.”

“네?”

“신휘 씨가 요청하셨고, 대표님도 일단 제한적으로 허용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요청한 적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왜 모두가 알고만 있는가.

물론 팬으로서 묻는다면 반갑다.

이웃집으로서 묻는다면 미묘하다.

“다만 외부인 출입 기록은 남겨야 해서, 임시 출입 확인서와 비밀유지 확인서를 작성해주셔야 합니다.”

나는 파일을 받았다.

서류였다.

회사에서도 서류. 소속사에서도 서류.

인간 사회는 결국 종이로 굴러간다.

나는 첫 장을 읽었다.

NOVA LINE MUSIC 연습실 출입 시 내부 정보, 미공개 무대 구성, 음원, 아티스트 동선 등에 대해 외부 유출하지 않는다는 내용.

출입 가능 범위는 연습실과 지정 대기 구역. 녹음 금지. 촬영 금지. 개인 SNS 언급 금지. 내부 인원 및 아티스트의 사적 정보 유출 금지.

당연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당연한 걸 굳이 문서로 써야 하는 이유도 알았다.

한 달 전, 세상은 신휘에게 당연한 선을 지켜주지 않았다.

“당연한 내용이네요.”

내가 말했다.

한유경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당연한 걸 문서로 써야 안 당연한 일이 줄어듭니다.”

그 말에는 실무자의 피로가 묻어 있었다.

나는 사인란에 이름을 적었다.

서도윤.

평범한 이름.

평범한 회사원.

그런데 지금 나는 SHINHWI의 복귀 라이브 리허설 출입 확인서에 사인하고 있다.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이렇게 됐을까.

아마 분리수거장부터다.

아니, 정확히는 그 전부터일지도 모른다.

SHINHWI라는 이름을 처음 눌러본 날.

검은 레이스와 붉은 조명 속에서, 사랑 노래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통제와 욕망을 노래하던 무대를 처음 본 날.

그때부터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옆에서 신휘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도윤 글씨 평범하네.”

“서류 쓰는 중에 평가하지 마세요.”

“내 글씨 예뻐.”

“알고 있습니다.”

“봤어?”

“전에 사인하실 때요.”

“오.”

신휘는 조금 만족한 얼굴이 됐다.

한유경 매니저는 깊게 숨을 쉬었다.

“신휘 씨, 서도윤 씨 서류 작성을 방해하지 마세요.”

“방해 안 했어.”

“방해하셨습니다.”

“구경.”

“그게 방해입니다.”

신휘는 입을 다물었다.

3초 정도.

그리고 다시 말했다.

“급식소.”

“신휘 씨.”

한유경 매니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회의 끝났으면 식사를 제대로 하셔야 합니다. 급식소만 찾지 말고요.”

“급식소에서 제대로 먹어.”

한유경 매니저가 나를 봤다.

나는 억울했다.

“제가 그렇게 주장한 적은 없습니다.”

“서도윤 씨 집에서 식사를 잘 하시나 보네요.”

“제가 챙기지 않으면 초코우유를 식사로 주장하셔서요.”

“아.”

한유경 매니저는 아주 짧게 이해했다.

그 짧은 이해가 슬펐다.

“신휘 씨, 초코우유는 식사가 아닙니다.”

“맛있어.”

“맛과 식사는 다릅니다.”

“비슷한 거.”

“다릅니다.”

한유경 매니저와 내가 동시에 말했다.

신휘는 우리 둘을 번갈아 보았다.

“둘이 짰어?”

“상식은 짜고 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신휘는 초코우유 팩을 흔들었다.

“상식도 배신해.”

“영양입니다.”

한유경 매니저가 말했다.

신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배신이 영양의 옷을 입었네.”

태준이 바로 펜을 들었다.

“오늘 네 번째 배신 변주—”

“쓰지 마.”

“검토하겠습니다.”

“검토도 하지 마.”

“보류하겠습니다.”

“그것도 배신 같아.”

“보류는 배신이 아닙니다.”

나는 서류를 한 장 넘겼다.

다음 장은 확인서였다.

임시 출입자 보안 확인 및 현장 협조 동의서

사인지는 두 개였다.

하나는 내 것.

다른 하나는 외부인을 초대한 내부 인원 확인란.

신휘도 같이 사인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한유경 매니저가 내 확인서 아래에 끼워져 있던 내부용 확인지를 신휘 쪽으로 돌렸다.

당연히 외부인에게 건네는 서류는 아닌 모양이었다.

“신휘 씨도 여기 사인해주세요.”

“귀찮아.”

“사인만 하시면 됩니다. 신휘 씨가 초대하셨잖아요.”

“사인도 귀찮아.”

“신휘 씨.”

“응.”

“사인.”

“치사해.”

태오가 말했다.

“일곱 번째.”

“진짜 세지 마.”

신휘는 투덜거리면서도 펜을 받았다.

그녀가 서류를 대충 받쳐 들고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내 쪽 서류를 정리했다.

그러다, 무심코 시선이 옆으로 갔다.

그러면 안 됐다.

남의 서류를 보는 건 예의가 아니다.

게다가 신휘의 서류다.

나는 바로 시선을 돌리려 했다.

그런데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 본 건 아니었다.

신휘의 손과 서류 모서리, 한유경 매니저의 파일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보였다.

81……

숫자가 그렇게 시작했다.

나는 멈췄다.

81.

순간 머릿속이 이상하게 정지했다.

81?

왜 81이 거기 있지?

아니, 당연히 있을 수 있다.

사번일 수도 있다. 내부 코드일 수도 있다. 아티스트 관리 번호일 수도 있다. 프로젝트 번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서류 양식의 위치가 이상했다.

내가 본 부분은 단순 코드처럼 보이지 않았다.

개인 정보가 들어갈 법한 칸.

앞자리.

숫자.

81.

나는 숨을 삼켰다.

말이 안 된다.

그럴 리가 없다.

아니, 내가 뭘 본 건지도 정확하지 않다.

그러니까 생각하지 말자.

그런데 사람은 생각하지 말자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생각하고 있다.

숫자가 있던 위치.

81로 시작하는 숫자.

1981년?

나는 신휘를 봤다.

짧은 흑발. 창백한 피부. 무심한 눈. 펜을 쥔 긴 손가락.

아무리 봐도 20대다.

화장을 지우면 더 어리게 볼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무대 위에서도. 내 식탁 앞에서도. 내 방 바닥에서 자기 다키마쿠라를 베개 삼아 뒹굴 때도.

아니.

마지막 예시는 나이를 판단하는 근거로 쓰면 안 된다.

그건 인간 사회 판단 근거로도 쓰면 안 된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연예인은 관리를 잘한다.

조명이 있다. 스타일링이 있다. 요즘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다.

그런데.

1981?

그러면 지금 몇 살인데.

마흔이 넘는다.

저 사람이?

초코우유 빨대를 물고 “급식소”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는 고개를 흔들 뻔했다.

아니다.

아티스트 코드다.

분명 코드다.

NOVA LINE MUSIC 내부에는 81로 시작하는 코드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81번째 계약 아티스트라든가.

SHINHWI의 약자라든가.

무슨 이유든 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그게 맞다.

그때 신휘가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왜.”

나는 바로 시선을 돌렸다.

“아닙니다.”

“아닌 얼굴 아닌데.”

“정말 아닙니다.”

“거짓말.”

평소 같으면 반박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신휘는 나를 빤히 보았다.

“도윤.”

“네.”

“너 지금 또 이상한 생각 하지.”

“안 합니다.”

“해.”

“안 합니다.”

“하고 있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문제는 하고 있었다.

아주 많이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상적인 방향으로 가지 않았다.

낮을 싫어한다.

밤에 작업한다.

피부가 창백하다.

마늘 들어간 김치를 시끄럽다며 싫어한다.

내 집에 들어올 때마다 “들어가도 돼?”라고 묻는다.

묻지 않으면 라면이 허가했다고 한다.

살짝 덧니가 있다.

무대 이미지는 지옥, 서큐버스, 검은 레이스, 붉은 조명.

그리고 방금 본 81.

나는 눈을 감았다.

아니다.

아니다.

정상적인 성인은 이런 결론으로 가면 안 된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에 뱀파이어가 있을 리 없다.

게다가 뱀파이어가 초코우유를 마시고 급식소를 찾을 리도 없다.

있다면 그건 장르가 너무 이상하다.

하지만 신휘 씨는 원래 장르가 이상하다.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신휘가 아직도 나를 보고 있었다.

새삼 이 예쁜 얼굴이 나이를 먹지 않는 얼굴로 보이기 시작했다.

“도윤.”

“네.”

“얼굴 이상해.”

“원래 이렇습니다.”

“아니.”

신휘는 아주 작게 웃었다.

“재밌는 거네.”

아니다.

재밌는 게 아니다.

이건 내 상식이 위기에 처한 순간이다.

한유경 매니저가 서류를 회수하며 말했다.

“서도윤 씨, 혹시 내용 중에 궁금한 점 있으실까요?”

나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아뇨. 없습니다.”

“그럼 이쪽 출입증도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목걸이형 임시 출입증을 건넸다.

검은 끈에 투명 케이스.

안쪽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서도윤 / GUEST

나는 그것을 받았다.

게스트.

맞는 말이다.

나는 이 세계의 손님이다.

팬도 아니고, 스태프도 아니고, 멤버도 아니고.

그냥 초대된 사람.

아니, 끌려온 사람.

신휘가 내 출입증을 보더니 말했다.

“도윤 게스트.”

“네.”

“멋없네.”

“그럼 뭐가 좋습니까?”

신휘는 잠시 생각했다.

“급식소.”

“제 직함을 시설명으로 바꾸지 마세요.”

하린이 바로 말했다.

“급식소 기사님.”

“하린 씨.”

“네.”

“순정만화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장르 융합이 유행이에요.”

“이 장르는 폐지해주세요.”

태준이 펜을 들었다.

나는 바로 말했다.

“메모하지 마세요.”

태준은 조용히 펜을 내려놓았다.

이번엔 이겼다.

작은 승리였다.

태오가 낮게 웃었다.

평소라면 나도 같이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웃음이 잘 나오지 않았다.

서류 모서리에 스쳐 지나간 숫자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81.

아니, 그건 아티스트 코드다.

코드여야 한다.

비슷한 무언가라도.

그렇지 않으면 말이 안 된다.

내 머릿속에서 상식과 팬심과 괴담과 초코우유가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연습실을 나왔다.

정확히는, 나오려고 했다.

신휘는 당연하다는 듯 내 쪽으로 왔다.

“도윤.”

“네.”

“급식소.”

“신휘 씨.”

“응.”

“오늘은 바로 가는 흐름이 아닐 것 같습니다.”

“왜.”

그 순간, 한유경 매니저가 신휘를 붙잡았다.

“신휘 씨, 오늘은 회사 차량으로 귀가를 준비하겠습니다. 대표님 호출 있습니다.”

“왜.”

“복귀 라이브 관련 최종 확인입니다.”

“방금 회의했잖아.”

“그건 실무 회의고, 이건 대표님 확인입니다.”

“비슷한 거.”

“다릅니다.”

“다 회의잖아.”

“그건 맞습니다.”

“그럼 비슷해.”

한유경 매니저는 잠깐 눈을 감았다.

“배신이 논리의 옷을 입었군요.”

신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내 거야.”

“빌렸습니다.”

“저작권.”

“계약서 확인하시겠습니까?”

“치사해.”

태오가 말했다.

“여덟 번째.”

“태오.”

“응.”

“너도 배신.”

“나는 숫자를 세는 카운터야.”

“카운터 배신.”

태준이 펜을 들었다.

“그 표현은—”

“쓰지 마.”

“보류하겠습니다.”

신휘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봤다.

“도윤.”

“네.”

“나중에.”

“네.”

“급식소 닫지 마.”

“시설 운영 시간이 정해진 적 없습니다.”

“그럼 열어둬.”

“그런 식으로 말하면 정말 식당 같습니다.”

“식당 아니야.”

“그럼요?”

“급식소.”

“그게 더 문제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신휘는 작게 웃었다.

그 웃음 사이로 아주 잠깐, 작은 덧니가 보였다.

나는 굳었다.

정말 아주 잠깐이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귀엽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생각은 위험하다.

아무튼.

지금은 지나칠 수 없었다.

작은 덧니가 보였다.

나는 굳었다.

81.

…아니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현대 한국에 뱀파이어가 있을 리 없다.

신휘 씨가 이상한 사람인 건 맞지만, 그 이상함에도 한계가 있다.

아마.

제발.

신휘가 물었다.

“왜 또 굳어?”

“안 굳었습니다.”

“굳었어.”

“출입증 목걸이가 불편해서요.”

신휘는 내 출입증을 봤다.

“게스트.”

“네.”

“급식소 게스트.”

“제 정체성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습니다.”

“비슷한 거.”

“절대 안 비슷합니다.”

한유경 매니저가 신휘를 데려갔다.

하린은 장비를 정리하러 돌아갔고, 태준은 회의록 파일을 품에 안고 사라졌다.

태오는 기타 케이스를 멘 채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잠깐 멈췄다.

그는 나를 돌아봤다.

“서도윤 씨.”

“네.”

“괜찮습니까?”

짧은 질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내가 지금 무엇에 대해 괜찮아야 하는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회의를 기다린 것? 출입증을 받은 것? 신휘가 급식소를 외친 것? 아니면 서류에서 본 81이라는 숫자?

나는 결국 직장인다운 대답을 했다.

“네. 괜찮습니다.”

태오는 잠깐 나를 보았다.

그리고 낮게 웃었다.

“안 괜찮은데 괜찮다고 하는 타입 맞네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태오는 더 묻지 않았다.

그게 더 이상했다.

마치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흔들렸는지, 완전히는 몰라도 대충 짐작한다는 듯했다.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내가 뱀파이어까지 갔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건 인간의 추론 범위 밖이다.

적어도 강태오는 뱀파이어로 보이지 않는다.

태오는 말했다.

“너무 빨리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나는 그를 봤다.

“네?”

“신휘는 원래 금방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는 잠깐 웃었다.

“그래도 서도윤 씨면 괜찮을 것 같네요.”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어떤 의미였을까.

설마 나를 신휘의 먹잇감이나 간편한 피 공급처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아니, 아니다.

아무래도 그것은 아니다.

먹힐 것이었다면 진작 먹혔을 거다.

혹시 라면이 내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는 거였을까?

태오는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나는 혼자 남았다.

손에는 임시 출입증.

목에는 GUEST라는 글자.

머릿속에는 81.

그리고 덧니.

나는 벽에 등을 기댔다.

“아니야.”

작게 말했다.

“그럴 리 없어.”

그 말은 신 씨를 만나고 내가 몇 번이나 했던 말과 닮아 있었다.

SHINHWI가 옆집에 있을 리 없다고.

신 씨가 SHINHWI일 리 없다고.

분리수거도 못 하고 오므라이스도 태우는 사람이 내가 사랑한 여신일 리 없다고.

그런데 그때도 나는 틀렸다.

이번에는 아니겠지.

아니어야 한다.

나는 출입증을 내려다보았다.

서도윤 / GUEST

그래.

나는 그냥 게스트다.

이 이상한 세계에 잠깐 들어온 손님.

그러니까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서류에 적힌 숫자가 무엇이든. 신휘가 낮을 싫어하든. 마늘 냄새를 피하든. 덧니가 있든. 허락받고 들어오든.

그 사람은 그냥 신휘다.

이상한 신휘.

생활력 없는 신휘.

초코우유와 라면과 급식소를 찾는 신휘.

내 최애이자 옆집 재앙인 신휘.

그걸로 충분하다.

충분해야 한다.

그런데 왜 머릿속 한쪽에서는 자꾸 말도 안 되는 단어가 떠오를까.

뱀파이어.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미쳤냐, 서도윤.”

내 목소리가 복도에 작게 울렸다.

다행히 아무도 듣지 못했다.

아마도.